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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설계공학 - 인간과 컴퓨터의 설계 전쟁
분야 산업기술/건축
융합과학/인공지능
날짜 2011-05-09

자동설계공학 - 인간과 컴퓨터의 설계 전쟁

글 : 김윤영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교수 ( yykim@snu.ac.kr )


1997년 5월, 체스 세계 챔피언 개리 카스파로프는 새로운 상대의 도전을 받았다. 도전자는 바로 IBM이 개발한 슈퍼컴퓨터 ‘딥블루’(Deep Blue). 23살에 세계 챔피언이 된 뒤 13년 동안 정상을 지킨 카스파로프와 딥블루의 경기는 세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고, 사람들은 아무리 발달한 컴퓨터도 인간의 판단과 전략, 예측 같은 복잡한 계산을 뛰어넘어 인간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경기 결과는 세상에 충격을 줬다. 체스 역사상 최고의 실력으로 인정받던 챔피언이 컴퓨터에게 패한 것이다.
이 사건은 컴퓨터에 대한 사람의 인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컴퓨터는 더 이상 단순하고 반복적인 계산만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인간만의 영역으로 생각된 창조나 예술의 영역까지도 넘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컴퓨터의 새로운 역할을 찾는 공학 분야가 나타났다. 바로 자동설계공학이다.


조각하듯 설계하는 컴퓨터

설계는 인간을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한 일등공신이다. 문명을 이루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어떻게 하면 목적에 맞는 도구를 만들 수 있는지, 즉 설계할 수 있는지를 알아야 했다. 예를 들어 마차가 빠르고 안전하게 달리려면 바퀴는 어떤 모양이어야 하는지, 강을 건너려고 다리를 놓으려면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알아야 했다. 강한 풍랑에 뒤집히지 않는 배, 무너지지 않는 고층 건물도 그런 구조를 먼저 설계해야 했다.

인간이 설계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인류 역사 동안 조금씩 그 능력을 발전시켜 전수했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과 수많은 시행착오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그래서 설계자는 오랜 시간동안 교육을 받고 많은 경험을 쌓아야 설계능력을 습득할 수 있었다. 천부적인 자질을 가졌더라도 처음부터 원하는 목적에 맞게 뚝딱 설계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자동설계기술을 이용하면 누구나 목적에 알맞은 최적의 설계를 매우 빠른 시간에 할 수 있다. 인간이 오랜 시간 수많은 과정을 거치며 발전시킨 구조도 이 기술을 이용하면 단숨에 설계할 수 있다.

강을 건너 놓여있는 다리를 예로 들어보자. 자동설계기술은 직육면체 같은 설계영역에서 시작한다. 조각가가 석고 덩어리를 깎아 작품을 만들듯 컴퓨터는 설계영역에서 중요한 부분은 강조하고 불필요한 부분을 없애가며 최적의 설계를 한다.

자동설계기술로 다리를 설계할 때는 먼저 양 강둑을 잇는 직육면체 모양의 설계영역을 컴퓨터에 설정한다. 그 다음 다리가 갖춰야할 여러 조건을 입력한다. 사람이나 차가 많이 다녀도 무너지지 않고, 태풍이나 지진도 견뎌야 하며, 스스로의 무게 때문에 붕괴해도 안 된다. 아래로 강물도 흘러야 한다.

컴퓨터는 이 수치를 토대로 ‘자동설계 알고리즘’을 이용해 직육면체의 내부를 조금씩 변화시키며 가장 적합한 다리를 설계하는데 놀랍게도 컴퓨터가 설계한 다리모양은 대부분 아치형이다. 인간이 오랜 세월동안 연구해 만든 구조를 컴퓨터는 단 몇 분 안에 찾아낸 셈이다.


상상하지 못한 최적의 형태를 만든다

대부분의 설계는 기존에 설계한 모양을 바탕으로 약간의 변화를 줘 성능 개선을 꾀하는 수준이다. 반면 자동설계기술은 이전에 한번도 설계된 적이 없던 대상이라도 최고의 성능을 가진 새로운 모습으로 설계한다.

소리를 흡수하는 방음벽이나 무향실의 벽면을 보면 작은 구멍이 뚫려있거나 계란판 모양으로 올록볼록한 구조다. 자동차의 소음을 연구하는 무향실은 벽면에 소리를 흡수하는 삼각형의 흡음재가 수없이 붙어 있기도 하다. 이는 사람이 계산하고 만들어낸 구조다. 그러나 이런 구조는 소리를 100% 흡수하지는 못한다.

반면 컴퓨터에게 자동설계 알고리즘을 이용해 소리를 전부 흡수하는 표면을 만들라고 명령하면 컴퓨터는 예상치 못한 모양을 제시한다. 성능도 훨씬 뛰어나다. 인간이 상상하지 못했던 형태로 목적에 알맞은 최적의 설계를 해낸다. 자동설계기술은 설계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완전히 바꾼다고 볼 수 있다.

자동설계기술이 사용하는 자동설계 알고리즘은 ‘해석’과 ‘최적화’의 단계를 반복적으로 거친다. 해석 단계에서는 직육면체에 가해지는 힘을 계산한다.

예를 들어 자동차가 벽에 충돌할 때 범퍼에 작용하는 힘을 구하려면 범퍼를 아주 작은 직육면체로 무수히 쪼개 직육면체 각각이 받는 힘을 계산한 뒤 합한다. 최적화 단계에서는 이 수치를 바탕으로 전체 힘을 더 낮출 수 있는 범퍼의 형태는 없는지 계산하고 그 모양을 만든다. 이 모양은 다시 해석 단계를 거치며 안전성 여부를 판단한 뒤 최적화 단계로 넘어간다.

자동설계 알고리즘은 최적화 단계에서 더 이상 성능이 좋은 다른 형태의 범퍼를 만들 수 없을 때까지 ‘해석’과 ‘최적화’ 두 단계를 자동으로 반복해 최종 설계도를 만들게 된다.


공학과 설계에 대한 지식은 필수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창조의 영역에 컴퓨터가 침범했다고 해서 인간이 컴퓨터보다 못하다는 생각은 금물이다.
패배한 체스 챔피언 카스파로프는 “컴퓨터가 마치 엄청난 지능을 가진 존재와 같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컴퓨터 딥블루는 수많은 체스말의 움직임에 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매번 체스의 말을 움직일 때마다 엄청난 경우의 수를 일일이 계산해 최적의 수를 판단했을 뿐 창조적으로 전략을 수립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딥블루가 인간 챔피언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체스에 정통한 딥블루의 제작자가 수많은 경우의 수를 전부 컴퓨터에 입력하고, 체스말의 위치에 따른 위험도를 분석해 승리하기 위한 최적화 알고리즘을 만들어 컴퓨터가 계산하고 판단하도록 한 노력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컴퓨터가 인간이 상상하지 못한 최적설계를 한다고 해도 그 밑바탕에는 공학과 설계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자동설계기술을 만들 사람이 필요하다.

자동설계기술로 인해 인간과 컴퓨터의 설계 전쟁은 시작됐다. 이 전쟁은 체스경기처럼 승패를 쉽게 판가름할 수는 없지만 자동설계기술이 널리 보급돼 기존의 설계방식을 대체할 날은 그리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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