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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힘으로 만든 나노 고분자 - 서울대 화학생명공학부 장정식 교수
분야 생명공학기술/생명공학
융합과학/나노
날짜 2011-04-05
긍정의 힘으로 만든 나노 고분자 
서울대 화학생명공학부 장정식 교수
| 글 | 김윤미ㆍymkim@donga.com |


“고분자를 나노 크기로 만들 거라고? 그건 이제껏 아무도 해낸 사람이 없어. 그래도 하겠다면 잘해봐. 굿럭(Good luck).”

진심으로 행운을 빈다는 의미의 ‘굿럭’이 아님을 장정식 교수도 알고 있었다. 장 교수는 1991년 서울대 화학생명공학부에 부임한 뒤부터 줄곧 신소재 고분자 연구를 해왔다. 물질에 금속이나 세라믹 같은 충진제를 넣어 강도를 높이거나 외형을 바꾸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2000년 미국 산타바바라 캘리포니아대로 안식년을 가면서 나노과학을 처음 알게 됐다. 마이크로입자의 1000분의 1에 해당하는 작은 입자를 만들어 활용하는 분야다. 세라믹이나 촉매 분야에서는 30~40년 전부터 연구가 됐지만 고분자는 예외였다. 고분자는 나노입자를 만들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다. 장 교수에게 ‘행운’을 빌었던 산타바바라 캘리포니아대의 갤런 스터키 교수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얼마 전에야 나노과학이라는 말을 들은 사람이 연주 주제를 나노 고분자로 바꾸겠다고 하니 얼마나 우스웠겠어요. 정말 할 거면 한국에서 학생이라도 한 명 더 데려오라고 하더군요(웃음). 하지만 그땐 뭔가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세상에서 가장 작은 고분자 물질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요.”

고분자를 나노 크기로 만들기 어려운 이유는 반응물의 상태가 계속 변하기 때문이다. 고분자는 ‘중합’이라는 과정을 거친다. 중합은 물질의 작은 단위인 단량체를 차곡차곡 결합시켜 분자량이 큰 고분자를 만드는 방법이다. 그런데 농도가 바뀌고 열이 발생하면서 열역학적으로, 운동학적으로 불안정한 상태가 된다. 쉽게 말해 단량체 1000개가 사라져 고분자 1개가 만들어지면 반응물의 농도가 바뀌어 운동학적으로 불안정한 상태가 된다.

“불안정하다는 말은 실험 상황을 통제할 수 없게 된다는 말이에요. 균일하지 않은 크기의 고분자가 만들어져 마치 인력이 작용하듯, 큰 고분자에 작은 고분자가 달라붙는 상황이 연출되죠. 그러면 ‘고분자 떡’이 되는 거에요.”



변덕스럽고 까다로운 고분자

당시 장 교수와 오준학 박사과정 연구원은 고분자가 걷잡을 수 없게 달라붙는 현상을 피하기 위해 수백 번의 실험을 거듭했다. 변덕스럽고 까다로운 고분자는 외부 조건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마그네틱 바를 돌리는 속도 하나에도, 실험실의 습도 하나에도 결과가 달라졌다. 봄에는 되던 실험이 여름에는 안 되는 경우도 있었다. 온도와 습도가 달랐기 때문이다.

장 교수는 물과 기름 성분에 모두 친한 성질이 있는 유화제를 실험에 사용했다. 유화제를 이루는 입자들은 일정농도가 지나면 달걀껍질처럼 구형의 틀만 남기고 속이 빠져나간다. 이 껍질 속에 단량체를 넣고 중합시키면 균일한 크기의 고분자를 만들 수 있다.






결국 장 교수와 오준학 연구원은 연구를 시작한 지 1년 만에 세계에서 가장 작은 지름 2nm (1nm=10억분의 1m)의 고분자 물질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2002년 ‘앙게반테 케미’ 11월호에는 투과전자현미경으로 찍은 나노 고분자 물질의 사진이 곱게(?) 실려있다. “먼지 같이 보이지만 이렇게 입자를 띄엄띄엄 늘어서도록 만드는 게 보통 기술이 아니다”고 말하는 장 교수의 눈에 자랑스러움이 묻어나왔다.

장 교수팀의 성과는 고분자에서는 나노입자를 만들 수 없다는 기존의 학설을 뒤집는 결과여서 더욱 의미가 깊다. 사실 장 교수가 실험을 하는 동안 같은 방법으로 실험한 결과를 먼저 발표한 곳이 있었다. 그 연구팀은 폴리피놀이라는 전도성 물질로 지름 80nm 크기의 나노입자를 만드는 데 성공했는데, 논문에 “여러 가지 조건 상 80nm 이하로는 고분자 입자를 줄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장 교수는 “같이 연구하는 학생에게 말은 못했지만 실험이 계속 실패하는 상황에서 다른 팀이 우리의 방법은 성공할 수 없다고 주장해 기운이 많이 빠졌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무언가 ‘확신’이 있었던 장 교수는 실험을 포기하지 않았다. 실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하나하나 검토하고 조정했다. 결국 앞선 연구팀은 유화제를 잘못 선택하고 합성 기술이 능숙하지 못해 실패했음을 밝혀냈다.

“회의적인 생각은 연구하는 사람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쳐요. ‘무조건 된다. 단지 그 과정까지를 찾지 못해서 그렇지, 반드시 된다’라는 마음을 가지면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일이 거짓말처럼 해결돼요. 이게 나노 고분자를 만들 수 있었던 비법이죠.”



‘개코’보다 더 냄새 잘맡는 바이오 전자코

구형의 나노입자를 만드는 데 성공한 장 교수팀은 이후 속이 빈 튜브모양에서부터 구멍이 송송 뚫린 스펀지, 섬유모양 등 다양한 모양의 나노입자를 만들었다. 길쭉한 모양은 빛을 반사시키는 성질이 있어 자외선 차단제로 좋다. 속이 빈 구형의 입자는 안에 약재나 유전자를 넣어 캡슐이나 촉매로 활용할 수 있다. 스폰지 구조는 표면적이 넓으면서도 구조가 안정적이라 수소에너지를 저장할 창고로 활용할 계획이다.

“과학과 산업계에서 나노입자에 대한 러브콜이 계속되는 이유는 나노입자가 가진 엄청난 표면적 때문이에요. 크기가 10~100마이크로미터인 기존 고분자라면 표면적은 1그램에 300~3000cm2가 나옵니다. 하지만 1나노미터가 되면 표면적은 3000m2로 1만 배나 늘어납니다. 이 작은 입자 1그램이 월드컵경기장보다 더 넓은 표면적을 갖게 되는 셈이에요.”

표면적이 넓어지면 극소량의 물질도 놓치지 않는 센서로 활용하기 좋다. 야구공이 날아올 때 정확히 유리창을 깰 확률보다는 건물 어딘가에 맞을 확률이 더 높은 것처럼 말이다. 장 교수는 같은 과에 있는 박태현 교수와 함께 바이오 전자코를 만들었다. 박 교수가 배양한 후각상피세포를 고분자재료연구실에서 만든 전도성 폴리머와 연결했더니 기존에 탄소나노튜브를 사용할 때보다 감응도가 100배 이상 좋아졌다. 장 교수는 이 연구로 올해 7월 ‘이달의 과학기술자상’을 수상했다.

연구원들도 나노 고분자에 푹 빠져있다. 고분자재료연구실에서는 석사과정 연구원들도 국제 수준(SCI급)의 논문을 다섯 편씩 쓰고 졸업한다. 연구원 생활 동안 노하우를 익히다보니 확실히 후배보다는 선배들이 고분자를 잘 만드는 편이다. 기업에서도 장 교수의 연구실 출신 연구원들이 인기가 많다. 기자가 찾은 날도 모 대기업에서 오직 고분자 재료 연구실의 연구원을 보기 위해 찾아오고 싶다는 전화가 왔다.

“제임스 본드가 혼자서 지구를 구하는 것처럼 우리가 성공하지 못하면 다른 데서는 절대 못한다고 말해요. 학생들도 다른 곳에서는 절대 배울 수 없는 지식과 기술이 우리 연구실에는 있다는 자부심을 갖는 것 같아요.”

나노 고분자를 만드는 원천기술과 이를 능숙하게 다루는 연구원들이 있어 고분자 재료 연구실에서 울리는 승전보는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고수의 비법전수

안 되는 건 없다. 힘들다고 도중에 그만두면 남을 이길 수 없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각으로 연구하는 자세가 평생을 살아가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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