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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분자에 대한 끝없는 도전 - 서울대 재료공학부 박수영 교수
분야 산업기술/재료 날짜 2011-04-04
초분자에 대한 끝없는 도전
서울대 재료공학부 박수영 교수
| 글 | 이종림 기자ㆍljr@donga.com |

 
 
   
 
 

흰 가운과 스포이트, 색색의 시약이 들어 있는 플라스크…. 흔히 ‘화학’ 하면 복잡한 화학식과 함께 이러한 실험실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러나 화학을 이용해 신문 속 사진을 움직이게 하고, 명함처럼 얇은 전지를 만들 수 있다면? 영화 속 이야기 같지만, 서울대 재료공학부 박수영 교수의 분자광전자연구실에서는 가능한 이야기다.

“유기화학은 탄소를 기반으로 한 화학입니다. 중고등학교에서 화학을 배우지만 유기화학이 첨단 전자제품과 관련돼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요. TV, MP3플레이어, 복사기, CD·DVD, 리튬 폴리머 전지, 최근에는 유기발광다이오드(OLED)로 만든 휴대전화까지 많은 제품에 사용되는 핵심 전자재료가 유기화학의 결과물입니다. 우리 연구실은 그런 유기전자재료를 연구합니다.”

과거에는 전자제품에 구리나 실리콘 같은 무기물이 쓰였다면, 최근에는 유기전자재료가 각광받고 있다. 무겁고 딱딱한 무기전자재료에 비해 가볍고 더 저렴하기 때문이다. 유기전자재료를 이용하면 데이터의 밀도가 높아질 뿐더러, 둘둘 말고 다니거나 옷에 붙이는 플렉서블한 전자기기를 만들 수 있다.

“유기전자재료는 분자 단위로 정보를 저장할 수 있어 메모리 밀도에 대한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옵니다. 또 유기 용매에 녹여 플렉서블한 기판에 붙일 수 있어요. 예를 들어 벽지에 인쇄를 해서 조명처럼 빛을 내거나 우산처럼 접는 태양 전지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화학이 생활을 바꾼다”는 박 교수의 말대로, 전자제품의 패러다임은 유기화학에 의해 바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유기전자재료가 적용된 플렉서블한 전자책, 조명, 전지는 이미 시제품이 개발된 상태다.

화학이 여는 전자제품의 새 패러다임 분자광전자연구실에서는 이처럼 전자기기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유기전자재료를 연구한다. 유기전자재료는 분자로 구성돼 분자전자재료라고도 불리는데 이들은 구성체의 크기와 특성에 따라 저분자, 초분자, 고분자로 분류된다. 연구실은 이중에서도 단위 분자의 특성 한계를 넘어서는 광전자기능성 초분자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유기 분자가 어떻게 집단을 이루고, 초분자체가 빛과 전기에 어떤 특성을 갖는지를 연구한다. 이를 위해 분자를 설계하고, 재료를 합성한 뒤, 특성을 분석해 소자를 제작하는 과정을 거친다.

“분자 하나 하나에 대해서는 유기화학 책에 잘 나와 있지만, 초분자의 세계는 아직 밝혀야 할 것이 더 많아요. 우리는 책에 나와 있는 걸 연구하는 게 아니라 새로 책에 쓸 내용을 연구합니다. 무엇이든 새로운 걸 찾아야 하죠.”

박 교수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만 간다”고 강력하게 선언한다. 무엇이든 새로운 것이어야 연구할 가치가 있다는 것. 그렇다면 새로운 제품의 구상이 먼저일까, 아니면 새로운 재료의 개발이 먼저일까. 마치 닭과 달걀 이야기 같지만, 둘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 연구원들은 전 과정에 전문가가 돼야 한다. 각자가 재료공학, 양자역학, 화학물리 등 모든 분야에 능해야 연구의 결과를 그릴 수 있다.

진정 창의적이려면 더 공부하라

분자광전자연구실은 박 교수의 지휘 아래 박사 후 과정 1명과 박사과정 9명, 석사과정 6명의 연구원으로 구성돼 있다. 이들에게는 ‘창의연구단’이라는 또 다른 이름이 있다. 국가 지정의 창의연구센터로서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연구 활동을 펼친다.

이들의 창의적인 연구에는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연구실은 1년에 평균 10편의 논문을 써내는데, 그동안 써낸 논문이 2008년에는 약 400회, 2009년에는 약 500회가 넘게 인용됐다. 지난해 작성한 논문 중 5편은 ‘달턴 트랜색션즈’, ‘JACS’, ‘스몰’ 등 세계적으로 저명한 과학 저널의 표지를 장식했다.

가장 최근에 주목받은 기술은 형광분자 하나로 흰색 빛을 내는, 일명 ‘분자 전구’다. 일반적으로 빛의 삼원색인 빨간색, 녹색, 파란색을 섞으면 흰 빛이 날 거라 예상한다. 그러나 실제 분자의 세계에서는 세 영역 간에 에너지 차이가 생겨 상대적으로 에너지가 적은 빨간색이 에너지를 뺏어와 우리 눈에 빨간빛이 두드러진다. 박교수는 기존 상식을 뒤집어 분자 내부에서 서로 에너지를 넘겨주지 못하는 트릭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 한 개의 분자에서 파란빛과 노란빛, 두 개의 보색을 동시에 내는 분자, 즉 흰 빛을 내는 분자를 세계 최초로 만들었다. 이 내용은 사이언스데일리, 영국의 과학잡지 뉴사이언티스트 등에 소개돼 큰 주목을 받았다.

또 한 가지는 빛을 내는 형광체에 대한 연구다. 지금까지 형광 분자는 농도가 높아지면 빛이 사그라드는 ‘농도소광’ 현상이 나타난다는 게 정설이었다. 그러나 분자광전자연구실에서는 의문을 가졌다. ‘농도가 높아질수록 더 밝아지게 할 수는 없을까?’ 그것이 실현된 게 ‘농도발광’이다. 화학 구조를 조금 바꾸니까 분자 간 결합이 가까워질수록 빛이 더 났다. 이 기술을 통해 눈부실 정도로 강한 형광체를 만들 수 있었으며, 나노 입자로 만들어 다양한 분야에 적용할 수 있게 됐다.

이 외에도 빛을 내며 전기가 통하는 유기나노와이어, 인광체를 이용한 불소이온 검출 물질 등 이들의 연구는 매번 새롭다. ‘발상의 전환’이 가져온 결과만 보면 간단해 보이지만, 그 과정에는 철저한 학습과 노력이 있다.

“창의성이라고 하면 흔히 엉뚱한 생각을 하면 되는 줄 아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기존의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새로운 걸 생각할 수 있어요. 창의적이려면 그 분야에 대해 더욱 철저히 공부해야 합니다.”

새로운 도전은 멈추지 않는다

활발한 연구 실적으로 지난해 서울대 학술상을 받은 박 교수는 본래 섬유공학을 전공했다. 학부시절 전기가 통하는 플라스틱에 호기심을 갖고 유기화학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책과 논문을 어렵게 구해 관련 분야를 독학해온 그에게 지금의 연구 활동은 오랫동안 공들여 이룬 꿈이다. 분자전자재료학 강의가 개설되고 연구실이 자리잡힌 것도 오랜 도전의 결과라 말한다.

현재 박 교수는 1년에 최소한 6~7번은 해외 초청강연에 서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국내 연구원들은 해외 학외에서 인정받지 못해 구두 발표조차 하기 어려웠는데, 지금은 들어오는 강연 요청 중에 좋은 기회를 골라서 참여할 정도로 위상이 높아졌다. 그럼에도 연구실은 여전히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 연구실은 분자를 넘어 초분자 재료를 향해 계속해서 도전해 왔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죠. 처음 목표는 세계적인 연구실이 되자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세계를 선도하는 연구실이 되는 게 목표입니다. 우리 연구원들이 해외에서 연구활동하는 걸 넘어 해외의 우수한 연구원들이 우리 연구실 문을 두드릴 날을 기대합니다."

고수의 비법전수

창의성을 키우기 위해서는 해당 분야에 대해 철저히 학습해 확실한 기본 지식을 갖춰야 한다. 그 토대 위에 새로운 생각이 탄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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