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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염 토양 살리는 ‘사회 속 과학자’ - 서울대 건설환경공학부 박준범 교수
분야 산업기술/토목
환경기술.에너지/기타
날짜 2011-04-04
오염 토양 살리는 ‘사회 속 과학자’
서울대 건설환경공학부 박준범 교수
| 글 | 이정호 기자ㆍsunrise@donga.com |

“1981년으로 기억합니다. 미국에서 토양 오염과 관련한 엄청난 사건이 알려졌어요.”
서울대 건설환경공학부 박준범(사진) 교수를 만난 2월초, “왜 이 전공을 선택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가 천천히 입을 뗀다. 박 교수는 토양오염 처리 분야의 권위자다. 국내외 특허 23건을 등록하고,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 논문도 25편이나 게재할 정도로 이 분야 학계에선 최고 전문가로 꼽힌다.

“나이아가라 폭포 아시죠? 그곳 주변에 운하를 파는 사업이 20세기 초에 진행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여러 가지 사정으로 1km 남짓 공사를 하다 작업이 중단돼 버렸습니다. 별 용도가 없는 거대한 구덩이가 생긴 거죠. 그런데 1930년대에 주변에 화학기업들이 들어서면서 여기에 폐기물을 마구 갖다 버리기 시작했어요. ‘재앙’이 시작된 겁니다.”

1950년대 쓰레기로 가득 찬 운하가 매립되고 그 위에 세워진 주거지에서 끔찍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백혈병 환자가 잇따라 발생하고 기형아 출산이 크게 증가한 것이다. 1970년대에는 신생아 두 명 중 한 명이 신체적 기형 상태로 태어나는 최악의 상황이 닥쳤다.

“이 사태로 토양 오염 문제가 미국에서 큰 이슈가 됐지요. 이런 상황을 한국에서 간접적으로 접하면서 이런 일이 남의 나라 일만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분야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두게 된거죠.”
 
   
 
 

토목 공학도의 변신
박 교수는 1990년 미국 휴스턴대로 떠나 토양 오염 분야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휴스턴은 정유시설이 밀집한 곳이다. 이 때문에 휴스턴대는 미국 내에서 토양 오염 연구가 고도로 발달한 학교로 꼽힌다. 최적의 학습 환경이었지만 박 교수의 유학생활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제 전공은 토목공학이었어요. 화학이나 생물에 관한 지식 수준이 그다지 깊지 않았죠. 처음엔 수업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었다. 한국에서 막연히 꿈꾸던 생활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데 이렇게 손을 놓을 수 없다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생물학, 화학 수업을 다 신청해서 들었어요. 힘들지 않았냐구요? 왜 안 그랬겠습니까. 하지만 공부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에 끈질기게 매달렸습니다.”
이처럼 ‘퓨전 학문’에 대한 의지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강한 집념은 그가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며 잇따라 혁신적인 연구 성과를 만들어 낸 원동력이 됐다.

2005년 국제학술지 ‘환경지질학회지’에 게재한 오염물질 누출감지 시스템은 쓰레기 매립지의 가장 큰 골칫거리인 침출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했다. 박 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은 값은 싸면서도 전국에 산재한 매립장에서 침출수가 새는지 여부를 30분마다 자동으로 확인하는 기술을 고안했다.

“강원도에 있는 몇 군데 매립장에 시제품을 깔아 운용했습니다. 침출수 누출 여부는 물론 매립장 관리 상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온도, 습도, 수소이온농도(pH)를 서울 연구실에 앉아 인터넷을 통해 한꺼번에 감시할 수 있었죠. 기존에 쓰고 있던 유럽 제품보다 여러모로 나았습니다.”

박 교수의 성과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토양 속 오염 물질을 제거하는 필터인 ‘투수성 반응벽체’를 2005년 개발해 일본 특허를 취득했다. 제올라이트라는 물질에 순수한 철가루를 입힌 것이 특허의 핵심이다. 중금속을 흡수하는 제올라이트 고유의 성질에 철에 녹이 슬면서 염화유기화합물의 독성을 낮추는 기능을 조합한 것이다. 염화유기화합물은 발암 물질로 알려져 있으며 트리할로메탄, 클로로포름, 브로모포름 등이 포함된다.

박 교수는 일정 지역에 듬성듬성 분포하는 오염물질의 총량을 알 수 있는 방법도 개발했다. 오염 물질과 반응하는 ‘추적자’ 물질을 땅 속에 흘려보내 하류에서 수거하는 방식이다. 오염 물질과 만난 추적자 물질은 흐름이 지체돼 수거되는 시간이 늦어지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지금은 보통 땅 속 여기저기에 구멍을 뚫어 오염 물질이 있나 없나를 확인하고 있죠. 그런데 오염 물질이 불규칙하게 분포하면 이런 방식으로는 총량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운 좋게 오염물질이 있는 곳을 뚫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실제보다 토양 오염 수준을 낮게 평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공 섬’ 연구 박차
박 교수는 이 같은 활발한 연구개발 활동 속에서 토양 오염을 사회적 시스템으로 해결하는 방안에도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가 꾸준히 추구하던 ‘사회적으로 공헌할 줄 아는 공학자’ ‘창의성을 발휘하는 공학자’를 적극 실천하는 차원에서다.
“미국에선 토양 오염에 대처하기 위해 1980년대 초반 28조원 규모의 펀드를 조성했습니다. 막대한 자금이었던 만큼 ‘이 정도면 전국적인 조사를 진행해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공감대도 있었죠. 하지만 실제 조사를 해보니 이 정도 자금으로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민간 자금을 끌어들이는 방법이 제안됐죠.”

이른바 ‘브라운필드 리디벨로프먼트’의 탄생이었다. 오염된 지역이 나타나면 재개발 업체와 정화기술 기업이 컨소시엄을 만들어 오염을 제거하고 해당 지역을 복원하는 사업이었다.

“한국에서도 이런 방식으로 오염된 토양을 정화하는 사회적 시스템을 구축해야 합니다. 폐광산이 대표적인 대상이죠. 갱도의 벽과 바닥에서 오염물질이 나오지 않도록 코팅을 한 뒤 와인 저장고처럼 식품의 숙성 시설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사시사철 온도가 유지되는 천연 냉장고를 방치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현대 사회가 당면한 공학적 문제에 폭넓은 시각으로 접근하는 박 교수의 태도는 청소년들에게도 큰 시사점이 있어 보였다. 기후 변화, 특수한 자원개발처럼 과거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주제를 전통적인 공학도의 시각에서 대처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교수로서 학생을 가르치는 그의 철학에도 이 같은 생각이 묻어 있었다.

“이제까지의 공학교육은 학생의 기술 역량을 극대화하는 데 주력해 왔죠. 하지만 이젠 달라져야 합니다. 엔지니어링의 기본 원리를 무시하자는 건 아니에요. 다만 더 독창적인 방법으로 공학적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을 가르치자는 겁니다. 한 마디로 ‘멋있는’ 공학도를 만드는 게 핵심이 되는 거죠.”

박 교수는 앞으로 개발도상국에 찾아가 매립장 관리 실태를 조사하는 작업도 추진할 예정이다. 한국과 함께 미국, 독일 등에 있는 학자들이 의기투합했다. “사회와 호흡하는 공학도로 계속 살아갈 생각입니다. 저와 함께 뜻을 나눌 후배 연구자들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이제까지의 공학교육은 학생의 기술 역량을 극대화하는 데 주력해 왔죠.
하지만 이젠 달라져야 합니다. 엔지니어링의 기본 원리를 무시하자는 건 아니에요.
다만 더 독창적인 방법으로 공학적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을 가르치자는 겁니다.”

고수의 비법 전수
현대 공학도에게 필요한 것은 창의력이다. 우리 사회는 과거처럼 특정 분야만 바라봐서는 해답이 안 나오는 문제 앞에 직면했다. 단순한 기술자 이상으로 살아가려면 비판적 사고와 도덕적 판단 능력을 기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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