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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전형CEO가 학교로 간 까닭은 - 이모션 대표이사 정주형
분야 정보기술.컴퓨터통신/기타
문화기술.과학커뮤니케이션/디지털아티스트
날짜 2011-03-31
야전형CEO가 학교로 간 까닭은-이모션 대표이사 정주형
| 글 | 박근태 기자ㆍkunta@donga.com |

1990년대 후반을 풍미한 벤처1세대라고 하면 으레 백전노장은 아니더라도 중년의 노련미 넘치는 리더를 연상하는 게 보통이다. 창업과 IPO(기업공개), M&A(기업합병 및 인수)라는 ‘거사’를 주도한 주인공이라고 얘기하기에 그의 외모는 너무 젊고 쾌활했다.

“창업이요? 이미 고등학교때 한 셈이죠.” 
벤처는 상상과 도전을 먹고 사는 꿈동산이다. 빛나는 아이디어와 젊은 패기, 짧고 정확한 판단력으로 승부하는 역동감이 살아 숨쉬는 야생지대와 같다. 정주형(32) 사장은 학생시절 창업해 오늘에 이른 보기 드문 젊은 벤처 1세대다. 대다수 벤처 1세대가 퇴진한 지금도 그는 여전히 현역으로 굳건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직 젊고 욕심 많은 때인 30대 초반의 사업가라면 누구나 한번쯤 실수로 흐트러질 만도 한데 그에게선 한 치의 오만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 대신 주저함이 없는 유쾌한 언변을 대하고 있자면 어느새 짧지만 열정이 넘치는 그의 삶에 동승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마치 물살을 뚫고 뛰어오르는 힘찬 연어처럼 싱싱한 그의 인생담은 품속을 깊이 파고들었다.


전공선택이 창업의 시작

 
   
 
 
벤처란 개념도 아직 정립되지 않았던 시절 맨몸으로 사업에 뛰어든 그의 얘기는 용감하다 못해 무모한 것처럼 들린다.

“학력고사 100일을 앞두고 미대 진학을 결정했어요. 선생님은 물론이고 부모님도 아연실색하셨죠. 문과에서 공부를 꽤 하긴 했어요. 당연히 문과계열 학과에 진학할 것이란 예상을 산산이 깨버렸죠.”자율학습 시간 우연히 펼쳐본 입시안내서가 인생의 새로운 좌표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산업디자인학과를 소개하는 글에 왜 그렇게 피가 끓었는지 명쾌하게 설명하긴 어렵지만 별난 선택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었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나선 그의 엉뚱한 모험에 행운의 여신은 ‘미소’로 화답했다.

하지만 막상 1992년 서울대 미대 산업디자인학과에 처음 들어섰을 때만 해도 그에게 뚜렷한 목표는 없었다. 단지 컴퓨터로 무엇인가를 그려보고 싶다는 어린 시절 꿈꿨던 막연함 뿐이었다. 입학 뒤 몇 달을 과외교습으로 ‘허송세월’을 보내던 그에게 선배가 던진 한마디 충고는 뼛속까지 파고드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눈앞에 보이는 이익만을 쫓다가 정작 투자해야할 시간을 다 놓치면 네게 남는 게 뭐냐고 핀잔을 주더라고요. 돈도 좋지만 훗날에 투자하라는 직언이었죠.” 그 고마운 충격 요법으로 그는 사념과의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주섬주섬 다시 자신을 챙겨 나가기 시작했다. 부모님을 졸라 당시로선 상당한 고가였던 컴퓨터 그래픽 작업용 매킨토시 컴퓨터를 장만했다.   

학생이긴 했어도 컴퓨터 그래픽 디자이너로선 가장 밑바닥 일부터 시작했다. 그에게 맡겨진 첫 사업은 한 중소기업의 제품을 디자인하는 일이었다. 고작 월 15만원을 받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일에 자신감이 붙었다. ‘써보니 좋더라’는 입소문을 타고 그의 이름도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중소기업 제품 디자인과 인쇄물을 전전했던 그에게 어느 날 한 대기업에서 연락이 왔다. 웹사이트에 올릴 멀티미디어 카탈로그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었다. 인터넷이 덜 보급됐던 당시 그는 국내에 몇 안되는 전문가 중 한 명이었다. 2개월을 컴퓨터와 씨름하며 그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멀티미디어 카탈로그를 완성해냈다. 곧이어 지갑 무거운 고객들이 그를 찾기 시작했다. 외국계 기업이 내놓은 입찰에서도 골리앗 대기업과 경쟁해 당당히 이겼다.

그리고 1996년. 그는 그때까지 모은 사업자금과 뜻을 함께 하는 동지를 모아 사업의 발판을 마련했다. 아버지도 회사 퇴직금을 선뜻 그에게 내줬다. 그렇게 설립한 회사가 바로 지금의 ‘이모션’이다. 회사 입구를 세련되게 장식하고 있는 회사 로고는 바로 그가 대학 2학년 때 만든 작품이다.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개성 넘치는 상징을 만들어오라는 교수의 말에 밤샘작업 끝에 얻은 결과였다. 디지털을 대표하는 ‘0’과 ‘1’이란 숫자를 조합한 로고는 언뜻 사람이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모션이라는 말도 디지털시대를 뜻하는 e와 전자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모션이라는 두 단어가 조합해 감성이라는 단어로 바뀌면서 감각적인 느낌을 물씬 풍긴다. 어떻게 생각해냈냐는 말에 그는 “8비트 컴퓨터를 갖고 놀던 어린 시절 경험에서 영감을 얻은 것 같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역시 현대인의 코드는 그의 직관을 거스르지 않았다.

냉정한 열정파 

 
   
 
 
젊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오랜 경험에서 나온 요구였을까. 지난 2003년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 정도로 경제가 악화되고 있을 때 그는 엉뚱하게도 대학원에 진학했다. 진정한 프로 경영인으로 거듭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런 판단에 주변사람들은 배가 산으로 가는 격이라며 의아해했다.  

“회사가 커지고 일이 늘면서 더 이상 ‘내가 좋아서’ ‘내가 하고 싶은 만큼만’이라는 말이 통하지 않더라구요. 회사가 더 성장하기 위해선 좀 더 냉철한 판단과 치밀한 전략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당시는 2002년 코스닥에 회사를 등록했지만 성장률이 조금씩 악화되는 시점이었다. 하지만 ‘경영의 도’를 어딘가에서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한 번도 수업에 빠지지 않고 학교를 다닌 2년간 회사는 적자를 냈지만 그래도 그는 후회하지 않는다. 값비싼 수업료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전에 강하기로 유명한 그는 얼마 전 ‘배운대로’ 실천했다. 이모션의 대주주였던 정 사장은 몇달전 자신 소유의 회사 지분 대부분을 내놓고 M&A를 단행했다. 또 한번 이해하기 힘든 엉뚱한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누구나 잘 키운 회사를 비싼값에 팔았나보다라고 섣불리 생각하겠지만 그 추측은 아쉽게도 빗나갔다. 기업이 성장하려면 재정적인 역동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틀과 내용물 중에 무엇을 선택하라고 물으면 주저 없이 내용물이라고 말하겠어요. 틀이나 형식보다는 어떤 내용물을 담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마찬가지로 회사를 소유하느냐 마느냐, 어떤 직책을 갖느냐는 중요치 않아요. 직원들도 그 뜻을 충분히 이해해줬어요.”

그렇게 그는 회사의 전문경영인으로 남았다. 요즘 들어 그의 성공 사례를 쫓아 ‘창업’을 꿈꾸는 후배들이 조언을 구하러 오는 일이 부쩍 늘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언제나 “평생 업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 밑바닥부터 훑으라”고 말한다. 지나치게 돈에 구애받지 말고 진짜 미래를 위해 시간을 투자하라는 것. 그가 정한 원칙이다. 물론 이는 학생시절 선배가 그에게 던진 충격요법이자 그가 냉혹한 기업 환경에서 터득한 오랜 경험이란다.

손해보기 십상이라는 일본 시장 진출에 그가 거는 기대는 크다. 까다롭기로 소문난 일본 소비자들의 감성을 적실 몇가지 야심찬 계획도 이미 마련해뒀다. 젊은 패기와 절제된 지략을 두루 갖췄으니 무서울리는 없을 것이다.

정주형 사장은
서울대 미대 산업디자인과를 졸업한 뒤 서울대 기술경영대학원을 수료했다. 대학 재학시절인 1992년부터 멀티미디어와 소프트웨어 기획자로 활약하기 시작해 1996년 이모션을 창업한 벤처 1세대. 대기업, 금융권, 일반기업 등과 100여개 프로젝트를 진행한 국내 정상급 e비즈니스 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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