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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만에 삼성·LG 이어 휴대폰업체 일궈낸 팬택앤큐리텔 송문섭 사장
분야 정보기술.컴퓨터통신/유무선통신 날짜 2011-03-31
4년만에 삼성·LG 이어 휴대폰업체 일궈낸 팬택앤큐리텔 송문섭 사장
빠른 기술변화 속에서 공학적 안목으로 판단한다
| 글 | 박미용 기자ㆍpmiyong@donga.com |


최근 휴대전화 생산업계의 국내 판도인 삼성과 LG의 양자구도가 흔들리고 있다. 팬택앤큐리텔이 시장점유율 20%를 달성한 것. 이같은 도약에는 공학자 출신 CEO, 송문섭 사장의 공학적 배경이 숨어있다고 하는데….


 
   
 
 
휴대전화 생산업체인 삼성과 LG. 이 두마리의 고래 싸움에 과감하게 도전을 건 공학자가 있다. 팬택앤큐리텔의 송문섭(51) 사장이 그 주인공. 송 사장은 지난 4년 간 불황 속에서도 5명 중 1명이 자사의 휴대전화를 사용할 정도로 기업을 성장시켰다.

이런 성공 덕분에 지난해 9월 상장된 이 회사의 주가는 첫날부터 상한가를 쳤고 덕분에 우리사주를 보유한 회사직원 수백명이 돈방석에 앉았다. 지난 2월 3일 팬택앤큐리텔은 지난해 1조3천8백58억원의 매출에 7백8억원의 영업이익, 4백3억원의 당기순익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이는 2002년에 비해 매출액에서 90% 이상 증가한 수치다.

단기간에 굴지의 기업을 키운 송 사장에게는 어떤 비결이 있었던 것일까. 서울 서초구, 예술의 전당과 가까운 곳에 자리잡은 팬택앤큐리텔로 찾아가 그를 만났다.

송 사장은 삼성에서 10여년 근무하다 2000년 옛 현대전자인 하이닉스로 스카우트됐다. 당시 하이닉스의 통신부문의 총괄부사장을 맡으면서 이동통신업계에 참여했다. 그런데 하이닉스의 부진으로 자금난에 허덕이면서 다음해 이동통신부문만 현대큐리텔이라는 명칭으로 분사됐다. 모기업으로부터 퇴출당한 셈이다.

송 사장의 당시 심정은 정말 막막했다. “데리고 나온 1천3백여명의 직원들 월급이나 제대로 줄 수 있을까, 이러다 망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었다”고 그는 말한다. 팬택앤큐리텔로 전환된 것은 그해 12월. 팬택이 참여하면서부터다.

이처럼 처참한 상황이 반전된 것은 송 사장의 공학자적 시각 덕분이었다. 팬택앤큐리텔은 수출만 주력하다가 2002년 10월 세계에서 가장 앞서가는 휴대전화 시장인 국내에 다시 복귀했다. 당시 카메라폰을 국내 최초로 출시했다. 이것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1년만에 삼성과 LG를 위협하게 된 것이다.

“카메라폰으로 승부를 걸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공학자 출신이어서 제품에 대한 판단을 빨리 했던 덕분”이라고 송 사장은 말한다. 그는 “기술이 매우 빠르게 변하는 휴대전화 업계의 경우 리더가 기술을 이해해야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주변에 물어보고 결정을 내리면 때를 놓치기 십상이라는 것.


박사과정 중 통신회사에 스카웃돼
송 사장은 통신기술 전문가다.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대학 다닐 때부터 통신에 관심이 있었다. 이 분야의 미래가 밝아 보였기 때문에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통신분야는 전자공학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진 않았던 때다.

그래서 졸업 후 송 사장은 통신분야를 계속 매진하지 못했다. KAIST에서 석사를 할 때에는 제어계측쪽을 전공했다. 졸업한 후 취직한 현대중공업에서는 공학과는 무관한 일을 하기도 했다. 기획관리 업무를 맡았던 것. 당시 송 사장은 “회사가 학교와 이렇게 다르구나”하고 느꼈다. 그는 연구를 더하고 싶어서 1년반만에 국방과학연구소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는 납땜도 하며 연구에 매진할 수 있었다.

국방과학연구소에서 3년 반을 근무한 후 송 사장은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그의 나이는 서른을 바라보는 29세. 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통신공학과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었다. 미 스탠포드대에서 박사학위로 통신에 쓰이는 디지털신호처리를 전공했던 것.
그러던 와중에 그는 통신업계의 실전에 참여하게 된다. 미국의 한 통신회사가 연구를 해보다가 안된 일을 자신의 연구실에 위탁했다. 그는 이 과제를 맡게 되면서 통신 산업에 발을 깊숙이 들여놓게 된다. “이 일은 진짜 통신에 쓰이는 기술이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가 뛰어든 덕분에 문제는 해결됐고 그 기술은 제품화되는데 성공했다. 그러자 이 회사는 졸업도 하기 전인 그를 스카우트했다. 그는 “미 통신회사에 근무하면서 통신기술을 많이 배웠다”고 말했다.

그가 다시 국내로 돌아온 때는 1989년이었다. 삼성에서 그를 불렀던 것. 당시 미국회사에서 어느 정도 자리도 잡고 잘 나가던 때라 고민이 많았지만 미국 회사가 자신이 한 일로 돈을 버는 게 애석해서 한국회사를 택했다.

송 사장은 삼성에서 처음 몇년 동안 통신연구를 했지만 이후 또다시 비공학적 일을 하게 됐다. 1991년부터 삼성 회장 비서실에서 기획업무를 맡게 된 것. 공학자로서 기량을 더 펼치지 못한 게 아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잘된 일이었다. 송 사장은 현재 한 기업을 이끌어가는 리더로서 처음 직장인 현대중공업과 삼성에서의 비공학적 업무를 맡았던 일이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비공학적 업무를 통해 경영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송 사장은 공학자가 리더로 성공하려면 그들이 갖는 문제점 두가지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첫번째는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설득하는 의사소통 능력이 없다는 점이다. 리더는 무슨 일을 하든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러려면 복잡하게 돌아가는 세상사를 혼자서 모두 껴안고 나아갈 수 없다. 여럿이 함께 일할 수 있는 팀웍이 있어야 하고 여기에 필요한 의사소통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송 사장은 공학도들이 자기분야만 아는 결점이 있다고 말한다. 리더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으려면 회계학, 경영학 등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공학자 출신의 CEO가 늘어나면 공학기피현상도 자연히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또한 “지금처럼 기피할 때 선택한 학생들은 10-20년 후 상당한 몸값을 받게 될 것”이라면서 “공학의 선택은 지금이 바로 적기”라고 덧붙였다.


자녀에게 어릴적부터 공학 강조
그렇다면 송 사장은 공학자의 길로 나선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을까. 아무리 자신이 하고싶은 일을 했다해도 후회는 누구나 한번쯤 해본다. 특히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자에 대한 예우가 낮은 까닭에 과학기술자들은 자신의 자녀가 과학기술의 분야를 선택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얘기한다고 한다.

하지만 송 사장은 “후회한 적이 거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나의 애 둘도 공대로 보냈다”고 얘기했다. 그는 남매를 두고 있는데, 현재 아들은 전자공학을, 딸은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있다.

송 사장은 “자식들을 공학자로 만들기 위해 어릴 적부터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여 왔다”고 말한다. 그는 틈만 나면 아이들에게 공학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분야가 오직 공학뿐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해줬다. 또한 컴퓨터를 일찍부터 접하게 해 공학과 친근한 환경에 익숙하도록 했다. 그는 지금도 아이들과 함께 공학 관련 얘기를 주고받는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지나온 삶을 세대별로 이렇게 정리했다.
“학교와 회사를 다녔던 20대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주로 실험실에서 생활했다. 그때는 시키는 일 한두가지에만 매달렸던 매우 단순한 삶이었다. 30대에는 미국 회사에 다니면서 공학자로서 경력을 쌓았던 때다. 그때는 시키는 일 외에도 개척하는 일을 병행해야 했다. 내가 하는 일이 사업성이 있는지도 고민해야 했다. 40대에는 남이 시키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내 스스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결정했다. 지금 50대에는 직접 하는 일은 거의 없다. 많은 사람들을 일하게 하고 태반이 사람을 만나 얘기하는 게 일이다. 이 와중에서 나는 나의 기술적 배경을 동원해 경영적 판단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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