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개발은 내가 한다 - LG생명과학 양흥준 사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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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임소형 기자ㆍsohyung@donga.com |
한국 최초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 신약 개발이라는 금자탑을 쌓은 생명과학계의 선두주자 LG생명과학 양흥준 사장. 신약 하나를 만들고 상업화하기까지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공계 출신이기에 올곧이 한길을 걸을 수 있었다. 그가 20년간 경험한 생명과학의 세계를 만나보자.
지난해 4월 우리나라에서 개발된 신약인 호흡기 질환 항생제 팩티브는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양흥준 사장은 생명과학 분야에 몸담은 지난 20년을 돌아보며 팩티브 개발을 가장 보람있었던 성과로 기억한다. 양 사장은 신약개발의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5월 제39회 발명의 날에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연구원에서 출발해 성공한 이공계 출신 CEO로 자리매김하기까지 양 사장의 인생 안에 담겨있는 철학을 들어봤다. 물리+화학+생물=생명과학
“삼국시대 때 고구려, 백제, 신라라는 나라가 있었고 각 나라들의 문화가 이러이러했다…. 도대체 그 다음은 뭘 공부해야 하지?”학창 시절 양 사장은 교과서에 모든 설명이 나열돼 있는 정치, 경제, 역사 같은 인문·사회과학 과목보다 계산이나 실험을 통해 스스로 명쾌한 해답을 얻어내는 수학이나 과학에 더 흥미를 느꼈다. 망설임없이 이공계로 진학한 양 사장은 도전을 좋아하는 성격답게 대학도 당시 입학 커트라인이 매우 높았던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선택했다. 1969년 대학 졸업 후 충주에 있는 한 비료회사에서 일하다가 1978년 현재 LG생명과학의 전신인 (주)럭키의 연구소에 개발부 과장으로 입사했다. “1980년대 초까지 생활에 유용하게 쓰이는 화학물질을 만드는 과정을 연구했죠. 전자제품을 세밀하게 가공하는데 필요한 PBT라는 고분자를 만드는 공정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개발했습니다. 또 국화꽃에서 나는 향기 때문에 모기 같은 벌레들이 죽는 것에 착안해 합성된 피레스로이드 살충제를 만드는 공정을 국내에 처음 도입한 것도 그때였어요.” 연구원으로서 탄탄한 발걸음을 내딛고 있던 그는 돌연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당시 막 태동하기 시작한 생명과학 분야에 대한 호기심과 도전의식 때문이었다. 1989년 워싱턴대에서 단백질 분리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양 사장은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럭키의 농화학사업부장으로 입사한다. 학생 때부터 물리학을 좋아했고,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고, 사회에 나와서는 생명과학 분야에 몸담고 있기에 과학에 대한 양 사장의 애정은 남다르다. 그런 그가 최근 ‘생명과학’이라는 용어가 마치 유행어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고 우려를 나타낸다. “요즘 일부 학생들은 ‘화학’하면 옛날 학문, ‘생명과학’하면 매력있는 최첨단 분야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생명과학을 깊게 연구하다 보면 소위 말하는 기초와 응용 분야를 모두 아우를 수밖에 없거든요. 생명과학을 공부하고 싶다면서 기초과학을 멀리하는 학생들을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생명과학은 결국 물리학, 화학, 생물학의 탄탄한 기반 위에서 비로소 발전할 수 있다는 얘기다. 양 사장은 연구 경력을 바탕으로 1996년부터 LG화학의 기술전략, 사업전략을 담당하면서 본격적으로 경영인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다. 2000년 생명과학사업본부를 만들어 LG그룹의 생명과학 사업을 이끌기 시작했고, LGCI의 부사장을 거쳐 2002년부터 현재까지 LG생명과학의 대표이사로 일하고 있다. 연구와 경영은 매한가지
연구와 경영을 모두 경험해본 이공계 출신 CEO로서 이 두가지가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양 사장은 의외로 ‘큰 차이가 없다’고 대답한다.“연구와 경영 모두 지식을 바탕으로 가정을 하고, 그것을 실제 상황에 적용해본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특히 연구개발을 바탕으로 비즈니스를 하는 LG생명과학 같은 기업을 경영하려면 과학적인 이해 없이는 어렵습니다. 간단한 예지만 용어 하나를 이해하는데도 훨씬 수월한 게 사실이에요.” 신약개발 분야는 더욱 그렇다. 아무리 빨라도 최소 15년은 걸린다. 사업가나 경영인의 입장에서 보면 과연 투자를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연구 분야에서 일해본 사람은 그렇게 오랜 기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인체 내에서 특정 질병이 발생하는 메커니즘을 알아내고, 거기에 작용하는 물질을 찾아내고, 그 물질을 촉진하거나 억제하는 신약 후보물질을 만들어야 하고, 그 후보물질이 인체 내에서 과연 제대로 작용하는지를 확인해봐야 한다. 처음에는 세포 수준에서 확인하고, 다음에는 동물에 투여해봐서 신약 후보물질이 과연 질병이 발생한 부위로 정확히 찾아가는지, 다른 부위에 독성을 나타내지는 않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최종적으로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임상시험이라는 까다로운 관문을 통과해야 비로소 신약이 탄생하는 것이다. 9월 미국에서 발매식을 가질 LG생명과학의 신약 ‘팩티브’도 개발에만 10년 이상이 걸렸다. 우리 기술로 신약을 만들어본 경험이 거의 없어 온갖 불확실성 속에서 일해야 했던 점이 가장 힘들었다고 양 사장은 연구개발 당시의 심정을 털어놓는다. “국내에 제약회사가 7백여개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발부터 허가까지 우리 스스로 만든 약이 없다시피 한 것이 현실입니다. 그만큼 신약개발이 어려운 분야라는 반증인 셈이죠.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가장 비전 있는 분야라는 얘기도 됩니다. 기술이나 장비들이 발달하면서 점점 가능성이 커지고 있어 도전할 가치가 있기 때문이죠.” 세계적인 연구성과들이 속속 나오고 있는 걸로 봐서 우리나라 생명과학 분야의 수준이 선진국 못지않다고 자부하고 있던 기자에게 양 사장은 ‘아직 멀었다’고 잘라 말한다. 과학자 한사람 한사람의 연구능력은 선진국과 별로 차이가 없지만, 우리 과학계가 스스로 문제를 인식하고 풀어내는 능력이 아직 부족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과정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조직화된 기관이나 기업이 많지 않은 것도 문제라고 그는 지적한다. 그래서 양 사장은 ‘우리 스스로 우리 약을 만든다’는 신념으로 LG생명과학을 이끌고 있다. 풍부한 연구 인력을 확보하고 연구개발에 다른 제약사의 수배 정도 되는 예산을 투자한다. 우리나라 국민뿐만 아니라 세계인을 대상으로 사업을 해야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는 것도 양 사장의 또다른 경영 철학이다. ‘LG Life Sciences’라는 회사의 영문명칭 중 science에 ‘s’를 붙인 이유도 생명과학을 연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비즈니스화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생각 이끌어내는 과학 교육 필요
양 사장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가장 가파르게 성장하는 사업이 교육과 보건 분야라고 생각한다. 삶의 질이 높아질수록 그만큼 사람들의 욕구도 커지기 때문이라고.“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아프면 아픈대로 참고 지내는 사람들이 많았죠. 그런데 요즘엔 누가 그럽니까? 단 1년을 살아도 좀더 건강하게 살고 싶어 하죠. 게다가 연구성과를 사업화하는 실력도 수준급이니, 생명과학 분야의 가능성은 그야말로 점점 더 커지고 있는 셈입니다.” 공부도 일도 스스로 재미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인생지론. 단순암기식 교육이 아니라 ‘생각을 이끌어내는’(thought provoking) 교육이 필요하다고 양 사장은 거듭 강조한다. “우리나라 이공계 교육 프로그램 자체가 잘못돼 있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하지만 형식적인 교과과정보다는 실제로 참여할 수 있는 교육이 더 필요한 건 사실이에요. 예를 들어 어려운 실험을 많이 가르치는 것보다 쉬운 실험이라도 기초 계획부터 결과 확인까지 스스로 해보면서 그 느낌을 맛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게 중요한 거죠.” 양 사장 자신도 대학원 재학 시절 화학물질을 핵자기공명장치(NMR)로 찍었을 때 그 분자식이 그대로 증명되는 것을 보고 무척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책으로만 읽었을 때는 도무지 어려워서 이해가 잘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한참 얘기에 열중하던 그가 갑자기 주변을 둘러보더니 메모지와 볼펜을 찾아내 뭔가를 적기 시작한다. ‘自然=本質’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바로 ‘자연’이며, 그 모습을 찾아가는 수단이 바로 과학이라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현상의 이면에 숨어있는 원리를 밝히는 과학자에서 과학이 이뤄낸 풍요로움을 인류에게 선사하는 CEO로 변신한 양 사장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생명과학을 향한 그의 열정이 묻어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