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출력 광섬유 레이저 개발의 주역, 영국 사우스햄턴대 정윤찬 박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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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박근태 기자ㆍkunta@donga.com |
어린 시절 만들기에 깊이 빠져든 소년이 있었다. 무엇이든 한번 손에 잡으면 온 정신을 빼앗겼던 소년은 20여년이 지난 지금은 빛에 깊이 매료돼 있다. 영국 사우스햄턴대에서 조교수로 활약하고 있는 광공학자 정윤찬 박사. 무엇이 그를 신비로운 빛의 세계에 끌리게 했을까. 1년 중 절반 이상이 우기인 비의 나라 영국에 체류하는 한 한국 과학자를 취재하라는 지시가 내려진 것은 공교롭게도 장마가 막 시작되려던 때였다. 창밖을 드리운 비구름의 보고 있자니 8시간의 시간차는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주말까지 학회에 참석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정 박사는 인터뷰 요청에 흔쾌히 응하기는 했지만 역시 바빴다. 모교인 서울대에서 학위를 취득한 직후 건너간 영국. 그동안 그는 한번도 한눈을 팔 사이가 없었다. 정 박사가 연구조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사우스햄턴대 광전자연구소 연구팀은 지난해 값진 수확을 거뒀다. 세계 최초로 1kW급 고출력 광섬유 레이저를 개발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고출력 레이저는 용접, 미세 가공같은 산업 현장뿐 아니라 인공 위성간 통신이나 원거리 관측 등 과학 군사 분야에서 널리 쓰이는, 파급 효과가 매우 큰 장치다. 세계 첫 개발의 현장에서
그러나 광섬유 레이저와 증폭기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고출력 레이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늘어났다. 정박사가 속한 사우스햄튼대 역시 지난 2001년 관련 연구에 착수했다. 연구팀은 수많은 실험과 실패를 반복한 끝에 비로소 이터븀(Yb)을 첨가한 광섬유 레이저에서 1kW급 레이저를 얻을 수 있었다. 실험에 들어간지 3년만의 일이었다. 정 박사는 그때의 감격을 잊지 못한다고 말한다. “단일 광섬유에서의 출력이 처음으로 1kW 장벽을 넘어섰어요. 아무도 예상치 못했었죠. 그때까지 기록된 세계 최고 출력을 훨씬 상회하는 결과였습니다.” 이같은 연구결과가 영국 정부를 통해 해외에 알려지면서 그와 동료들은 잠시 유명세를 치르기도 했다. 얼마 전 첨단방산기술의 산실인 미국의 DARPA는 정 박사팀의 연구 결과를 지난해 자신들이 후원한 과제들 중 최고의 연구성과로 선정했다. 정 박사는 레이저를 이렇게 설명한다. “레이저는 단순한 과학적 실험을 넘어서 산업과 학문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기초 기술입니다. 위성 간 통신이나 원거리 관측 등 안쓰이는 분야가 거의 없을 정도니까요. 그래서 연구자들 간에 경쟁의식도 강한 편이죠.” 하지만 아직까지 레이저는 일반인들에겐 낯선 학문이다. 그래서인지 정 박사는 요즘도 간혹 ‘스타워즈에 등장하는 레이저총을 만들줄 아느냐’는 우스개 질문을 받는다고 한다. 그는 그럴 때마다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라고 정중히 답한다고 말한다. 아직 그런 단계는 아니지만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한 우문현답이다. 실제 고출력 레이저로 단 1초 만에 두꺼운 철판을 뚫을 수 있으니 그리 과장된 얘기도아니다. 레이저 명문 사우스햄튼에 가다
“방학 때면 뭔가를 혼자서 열심히도 만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방학 숙제로 받은 만들기 과제 말고도 더 해갔어요. 처음엔 의아해하시던 선생님도 나중엔 칭찬을 많이 해주셨죠.” 위인전에 등장하는 발명왕 에디슨과 근대 물리학의 아버지 뉴턴과 같은 삶은 그의 꿈이었다. 특히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전기현상이었다고 말한다. “전구와 전선, 전지를 이리저리 바꿔가며 나름대로 연구도 많이 했죠. 나중에 대학 전공으로 전기공학을 선택한 것도 아마도 그런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중고등학생 시절 정 박사는 과학과 수학 외에도 국어와 미술을 특히 좋아했다. 그의 미적 능력을 높이산 미술선생님이 미대 진학을 권유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자연과학자 되겠다는 생각에는 결코 변함이 없었다. 어쩌다 ‘과학자의 길을 가지 않고 미술가나 디자이너가 됐으면 어땠을까’라고 상상할 정도면 족했다. 레이저와 광학을 처음 접한 것은 대학 학부과정에서였다. 전기공학을 전공하며 배운 전자기장 이론에 흥미를 갖게 되면서 같은 전자기파의 일종인 빛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특히 인간이 만들어낸 빛인 레이저는 더욱더 그를 가까이 끌어들였다. “우리 주변을 온통 에워싼 빛으로 정보와 에너지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교수님의 말이 지금도 머리에 남아 있습니다. 광학은 과학적이면서 동시에 철학적인 면을 갖고 있어요.” 레이저와 광공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한 것은 대학원을 진학하면서부터였다.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그는 더욱더 깊은 빛의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학위를 마치고 2001년 가게된 사우스햄튼대는 레이저를 공부하는데 최적의 환경이었다. “광전자연구소(ORC)에서 연구교수로 일하게 된 것은 정말 행운이었습니다. 사우스햄튼대는 이미 1980년대 중반부터 레이저 연구의 명문으로 성장해왔습니다.” 현재 정 박사는 수석연구교수(Senior Research Fellow)로 2명의 박사과정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아직까지 학생을 가르치는 것보다는 연구에 몰두하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한다. 학문은 기나긴 고뇌의 산물
삶의 역경이나 고난에 대해 그는 담담하다.“살면서 큰 역경이나 고난은 없다고 생각해요. 어려운 가운데서도 항상 긍정적인 면을 바라보려고 하죠. 때론 너무나 꿋꿋해하는 모습이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할 때가 있어 미안하기도 합니다.” 도전과 역경이 없는 삶은 소극적일 수밖에 없고 그 때문에 행복을 누릴 기회도 줄어들게 된다는 것이다. 학문에서 느낄 수 있는 희열은 잠시일 뿐 배움에는 긴 고뇌가 따른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하지만 그런 그도 어쩔 수 없는 한가정의 가장임은 잊지 않는다. 일과후나 주말에는 연구에 대한 생각을 털어버리고 가족과 단란한 시간을 보내기 때문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테니스와 축구를 즐깁니다. 특별히 축구는 팀웍이 필요한 운동이라서 더 좋아합니다.” 사우스햄튼 한인회 축구클럽에서 현재 정 박사의 포지션은 포워드다. 그의 최근 관심사는 고출력 광섬유 레이저 기술의 한계를 넘어서는데 있다. 특히 레이저 이득 물질 안에서 좀더 자유로운 파장 변환을 깊게 파고들 계획이다. 이를 위해 지금까지 연구를 한번 되돌아 볼 때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이처럼 무엇인가를 새로 시작할 때마다 단재 신채호를 떠올린다고 말한다. 학생 시절 단재 선생의 조선상고사를 탐독했던 그는 단재의 사상을 통해 학자의 본분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됐다고 한다. 정 박사는 “내가 말하는 것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닐지라도,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이라야 세상에 떳떳이 말할 수 있다고 하신 단재 선생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새겨 언제나 부끄럽지 않은 연구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도 역시 이와 똑같은 말을 이공계를 전공하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