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박사 출신 첫 IBM 본사연구원 - 장문석 박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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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박근태 기자ㆍkunta@donga.com |
미 IBM 본사 소속 연구원 장문석 박사. 그는 수백명의 한국출신 IBM 직원 가운데 유일한 국내 박사 출신 엔지니어다. 미국 텍사스 오스틴에 위치한 연구소에서 그는 매일처럼 컴퓨터와 지루한 씨름을 하고 있다. 한번 뭔가를 시작하면 대충이란 결코 없다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장문석의 사는 얘기를 들어봤다. 17대 국회의원 선거날인 지난 4월15일. 장 박사는 서울에 있었다. 2001년 한국을 떠난 이후 3년동안 두번째 방문이었다. “투표도 할겸, 그동안 태어난 손주들을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안겨드릴 겸 왔습니다.” IBM본사 정식 연구원이 됐음에도 그가 아직까지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은데는 뭔가 장 박사 나름의 고집이 있는 듯 했다. 가족과 보내기에도 빠듯한 짧은 방문 기간이었지만 그는 모교를 찾아 후배들을 만나는 것을 결코 잊지 않았다. 오늘의 인간 장문석을 낳은 곳이자 공학도의 꿈을 키웠던 곳이기 때문이다. “모교와 한국을 떠나기전 다녔던 직장은 제게 친정과도 같습니다. 소프트웨어 개발자의 자질 뿐만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삶의 자세를 배운 곳입니다.” 성공을 향해 앞만 보고 달려왔을 것만 같은 장 박사의 의외의 대답이었다. 대학 때 처음 만난 컴퓨터
장 박사는 어렸을 때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던 공상과학만화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장 박사가 과학에 눈을 뜨게 된 데는 과학교사인 부모님과 초등학교 담임선생님들의 영향이 컸다. 당시 텔레비전 과학 코너에 출연했던 아버지와 선생님들에게서 듣는 얘기가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고 장 박사는 회상한다. 그렇게 자연스레 이공계 지망을 마음속에 키워가던 고교생 장문석은 사촌형의 말 한마디에 평생을 건 도전을 시작한다. 당시 컴퓨터를 전공하던 대학생이었던 사촌형은 장문석이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컴퓨터며 인공지능에 대한 얘기를 들려줬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른채 얘기를 듣던 장문석에게 그때부터 분명한 목표가 생겼다. 컴퓨터, 특히 소프트웨어를 공부해야겠다는 욕심이 마음을 파고든 것이다. “그때까지 사실 컴퓨터를 한번도 제대로 본적이 없었어요. 순전히 들은 얘기만 가지고 진로를 선택했죠. 다만 사람 두뇌를 대신하는 인공지능이란 말에 왠지 마음이 끌리더라구요.” 컴퓨터가 흔치 않았던 86년 장문석은 서울대 계산통계학과에 진학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컴퓨터 공학이란 학문이 여러갈래로 나눠져 있었다. 계산통계학은 컴퓨터의 각 분야 가운데 소프트웨어에 가장 가까운 분야였다. 대학에 진학하자마자 그가 처음 마련한 것은 8비트 ‘애플’컴퓨터였다. 전공을 소프트웨어로 선택했지만 처음 갖게 되는 컴퓨터였다. 그동안 못 만져본 한을 풀기라도 하듯 장문석은 대학 4년 내내 컴퓨터와 씨름했다. 눈으로만 보지말고 직접 해보라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장 박사는 전공을 좀더 확실히 할 필요를 느꼈다. 그렇게 선택한 것이 운영체제(OS)였다.“컴퓨터에서 소프트웨어는 사람으로 따지면 정신입니다. 그런 소프트웨어 가운데 또 핵심은 운영체제구요. 하지만 당시만 해도 국내에 실력있는 OS전문가는 거의 없었습니다.” 소프트웨어의 연구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공부의 가닥을 잡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든든한 후원자가 된 사람이 지도교수인 고건 교수였다. 당시 미국 대학에서 공부를 마친 고 교수는 연구의 불모지였던 한국행을 마다하지 않았다. 지도교수가 돌아오면서 사재를 털어 가져온 유닉스(Unix)와 컴퓨터는 곧 장 박사의 교과서가 됐다. 책에서 배운 이론만으로는 컴퓨터를 절대 이해할 수 없다는게 고 교수의 지론이었다. “이론도 중요하지만 실무적인 능력도 함께 강조하셨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연구에 뛰어들 수 있는 준비된 연구자가 되려면 직접 만지고 동작시켜봐야 한다는 말씀이셨습니다. 강의때마다 항상 직접 해보라는 주문을 하셨습니다.” 장박사는 그때는 스승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자신도 후배들에게 똑같이 얘기하게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소프트웨어 연구자가 되는 길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소프트웨어 전공자들이 그렇듯 장 박사도 같은 또래 연구자들에 비해 논문 수가 적은 편이다. 가시적인 성과가 금방 눈에 띄지 않는 학문의 특성상 좋은 논문을 쓰기는 하늘의 별따기였다. 한두해 학위는 점점 늦어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알맹이 없는 논문을 쏟아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소프트웨어 분야가 워낙 까다로와 논문 쓰기가 쉽지 않습니다. 논문 편수가 많으면 좋기야 하겠죠. 하지만 제대로 된 논문 한편을 내는 게 더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덕분에 남들보다 조금 긴 박사 과정을 밟았다고 장 박사는 쑥스러워 한다. 하지만 유학가서 배우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배웠다는 점에 자부심을 느낀다. 학위와 병역을 마친 장 박사는 본격적으로 직장을 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처음 입사한 곳이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최고의 국책연구소지만 지방에서 근무해야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서울이냐 지방이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어요. 실무와 이론을 함께 배울 수 있느냐가 더 중요했습니다.”연구원에 들어간 장박사는 국가주전산기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대용량 컴퓨터의 완전 국산화를 목표로 정부가 야심차게 진행하던 연구개발 사업이었다. 장 박사가 맡은 부분 역시 그의 전공이었던 운영체제 개발업무였다. 장 박사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가 가져야할 실무 능력이 어떤 것인지 많이 배울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그리고 3년뒤 장 박사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쉽지 않는 결정을 내린다. 새로 직장을 구하던 장 박사의 눈에 띈 건 IBM본사 연구원 모집 공고였다. 번번이 실패한 한국형 OS에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차였다. “오기가 생겼습니다. 세계 제1일의 IT 연구소에서 한번 제대로 배워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소프트웨어 개발자는 끈기로 먹고 사니까요.” 그러나 세계 최고의 IT기업인 IBM의 문은 역시 호락호락 열리지 않았다. 함께 일하게 될 직장 상사들은 물론 동료 엔지니어들과 1박2일 내내 일대일 면담을 통해 실력과 가능성을 평가받는 혹독한 과정이 앞을 가로 막았다. 이런 방식은 세계 톱 기업들 사이에선 이미 보편화된 직원 선발 방식이었다. “이론만 잘 알고 있어서 될 일이 아니더군요. 개발자가 처할 여러 상황들을 설정해놓고 어떤 원인에서 일어났는지, 너라면 어떻게 처리하겠는지 아주 구체적인 것까지 묻더군요. 직접 문제를 해결해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절대 통과할 수 없을 겁니다.” 장 박사는 IBM외에도 이미 대학원 재학시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미국의 통신회사인 AT&T 자회사에서 4개월간 실무연수를 받은 경력이 있다. 연구원 시절에도 유닉스 개발자들이 모여 설립한 SCO라는 회사에서 1년 넘게 교환근무하기도 했다. 장 박사는 이때 ‘세상이 정말 넓다’라는 것을 이해하게 됐다고 말한다. “책에서 봤던 것들을 눈앞에서 실제로 만들더군요. 제가 지금까지 본게 정말 얼마나 일부분에 불과했던가를 깨닫는 순간이었어요.” IBM측도 장문석의 이런 값진 경험을 높게 평가하고 그를 채용한 것이다. “중요성 불구 외면 아쉬워”
이번 방문에서 장 박사는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졌다고 말한다.“많은 후배들이 취업을 걱정합니다. 다시 의대를 간다는 후배도 있고 변리사 같은 전문직으로 진로를 바꾸겠다는 후배도 있었죠. 이공계 전반에 걸친 문제라고는 하지만 소프트웨어쪽은 정말 심각한 상황입니다.” 빠른 결과를 얻기 힘든 일에 쉽게 지쳐버리는 세태가 안타깝기만 하다. 특히 소프트웨어 분야가 다른 나라에 비해 아직까지 뒤처져 있는 것도 쉽게 빨리 결과물을 얻으려고 하는 조급증 때문이라고 장문석은 생각한다. “화려하게 보이는 소프트웨어는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그 성과는 결코 쉽게 눈에 띄지 않습니다. 천천히 보이지 않는 변화를 만드는 것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이 갖춰야할 덕목입니다.” 장 박사는 후배 엔지니어들에게 좀더 넓은 세계로 눈을 돌리라고 충고한다. 배울 것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이다. 세계가 점점 더 좁아지고 활발히 교류하는 이때에 엔지니어가 우물안 개구리로 남아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말로만 듣던 중국인과 인도인의 힘을 IBM이란 한 회사 안에서도 그대로 실감할 수 있습니다. 미국 기업이지만 이들 나라 출신의 엔지니어들의 힘으로 나가는 셈이죠. 그에 비해 더 능력있는 한국 엔지니어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은 좀 아쉽습니다.” 장 박사는 개방적인 생각과 활발한 의사소통이 필요한 엔지니어만큼 국제화 시대에 가장 잘 맞는 직업은 없다고 말한다. 항상 열린 마음가짐과 준비하는 자세만 돼있다면 국적은 문제되지 않는다는게 장 박사의 생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