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前)청계천복원추진본부 전략사업팀장 정재용 |
도시설계는 자와 연필로 하는 게 아니다 |
| 글 | 박근태 기자 ㆍ kunta@donga.com |
|
미국의 유명 게임업체 맥시스가 만든 심시티(Sim City)라는 게임이 있다.
‘모의’라는 뜻의 시뮬레이션과 도시를 합친 이름의 이 게임은 가상의 살기 좋은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 줄거리다. 게이머는 게임개발회사가 던져준 전지전능한 능력을 이용해 마음껏 자신이 그리는 이상 도시를 설계할 수 있다.
그러나 전지전능한 능력은 엄격한 책임이 뒤따른다. 신이 아닌 이유로….
시간이 흐를수록 곳곳에서 문제가 터진다. 공장은 물질적 풍요를 낳지만 환경오염과 사회 갈등을 낳는다.
여기저기 초고층 빌딩들이 하늘로 뻗어 오르면 오를수록 가상 도시인의 스트레스 지수도 함께 치솟는다.
게임은 그렇게 가장 완벽한 도시는 없다는 교훈을 던진다.
그 대신 조화롭게 성장한 도시에 손을 들어준다.
도시설계전문가인 정재용(32)씨도 이 같은 ‘도시의 조화로운 진화’에 주목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 그는 심시티의 시뮬레이션 공간이 아닌 ‘실(實)시티’에서 그 해답을 구하고 있었다.
물론 실제 도시는 심시티의 가상도시보다 훨씬 복잡한 공간이다.
지금은 맑은 물이 흐르는 도심의 명소로 자리 잡은 청계천이 바로 정씨의 실험공간이었다.
정씨는 도심의 건물 숲을 관통하던 청계고가도로 상판을 처음 떼어낸 첫날 훨씬 전부터 이 사업을 준비해왔다.
“도심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대형 콘크리트 더미(고가도로)를 짧은 시간 안에 철거하고 물길이 끊긴 하천을 되살리는 것만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죠.
문제는 공사 전부터 주변 교통 흐름과 철거와 재개발로 생계 수단을 잃게 된 주변 상인들의 생계 대책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도시설계는 자와 연필만으로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지난해 말 추진본부가 해체되기 전까지 그는 청계천 복원과 주변 지역의 효율적인 재개발 방안을 마련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올해 말부터 시작되는 세운상가 인근 지역 재개발 계획 역시 그의 작품이다.
그가 만든 계획대로라면 2020년경이면 서울 도시건축의 상징인 세운상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그 자리엔 남북으로 길게 뻗은 녹지 공원이 들어서게 된다.
지금도 지난 4년간의 시간은 아득하기만 하다.
실(實)시티가 준 교훈
학생시절 그에게 도시는 중요한 화두였다.
그가 공부한 대부분의 건축물들에는 언제나 도시라는 키워드가 따라다녔다.
건축거장 렘 쿨하스와 경제학자 하이에크를 존경하는 건축학도였던 그의 인생이 바뀐 것은 한 지인의 소개로 이명박 현 서울시장의 선거캠프에 참가하면서다.
당시 서울대 환경계획연구소 대학원생이던 정 씨에게 도시정책수립 임무가 맡겨졌다.
도시의 참의미를 재발견한 것도 바로 그때였다.
일을 하면서 그 어마어마한 규모와 그 안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역학 관계에 점점 매력을 느꼈다.
“도시 현황을 조사하기 위해 헬리콥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창조주가 된 느낌이었어요.
차가 들고나는 길 하나, 건물 배치 하나를 바꿀 때마다 사람들은 울고 웃습니다.
훌륭한 건축물은 짓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도시가 갖는 힘은 상상 그 이상이었죠.”
건물 한두 채를 짓는 일은 더 이상 그의 성에 차지 않았다.
물론 처음에는 그도 도시설계란 개념이 낯설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도시를 만들고 운영하는 것은 모두 나라에서 알아서 할 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그가 일을 시작한 때는 마침 대규모 신도시가 들어서고 도심 재개발이 이슈가 되면서 도시설계의 중요성이 조금씩 소개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그렇게 맺은 인연은 청계천 사업으로 이어졌다.
수년간의 청계천 ‘현장’에서 그가 얻은 교훈은 도시설계 분야에는 결코 실험은 없다는 것이다. 한번 정한 계획은 쉽게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못 설계된 도시는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기 마련이다.
“건축은 설계자의 실험정신이 강하게 반영되지만 도시는 실험 대상이 아닙니다.
설계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어떤 지역이 살기 좋은지 아닌지, 차량과 사람이 다니기 좋은지 결정되기 때문이죠.” 설계자의 판단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친다. 도시의 청사진을 그리는 일은 그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작업일 수밖에 없다.
전문가로서 그는 도시의 융합과 조화를 강조한다.
도시는 어떤 획일적인 모습만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도시를 이루는 여러 요소들 간에 조화가 도시의 전체 분위기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도시 디자인에 다양한 가치관과 조화로운 삶의 단면을 담아내야 한다는 것은 그가 강조하는 설계 철학이다.
수많은 사람과 건물, 자동차로 북적이는 서울은 그런 점에서 그에게 딱 맞는 연구 모델일지도 모른다. 무(無)컨셉이 컨셉인 서울의 아이러니한 모습에서 그는 가능성을 찾는다.
“최근 미래형 도시다, 생태형이다 말들도 많지만 이것은 그저 공학적인 접근방식일 뿐이죠. 도시란 그보다 복잡합니다. 다양한 가치들이 서로 부딪히고 합쳐지죠. 도시는 어떤 명료한 상이 있는게 아니라 큰 비전 아래 방향성을 갖고 진화합니다.”
오감만족의 도시
청계천 사업은 아직도 그에게 벅찬 감동으로 남아있다.
건물 숲 사이로 다시 물길을 열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했다.
정 씨는 서울도 경쟁력을 서서히 갖춰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도시 디자인은 결국 도시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행위와 다름없다.
“최근 들어 도시 경쟁력이 국제사회에서 이슈로 떠올랐어요.
뉴욕이나 런던, 상하이 같은 세계 주요 도시들은 각자 개성을 뽑내며 관광객을 유치합니다. 도시 경관은 바로 이러한 도시 이미지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지요.
이들 도시들이 도시 디자인에 많은 투자를 하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요즘 그는 모처럼만의 휴가를 만끽하고 있다. ‘거사’ 성공 뒤에 얻은 약간의 휴식이라기 보다 다음을 대비한 충전의 시간이 더 어울리는 표현이다.
“도시 디자인을 기획하고 정책을 수립하는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도시 설계는 단순히 공학적인 측면 뿐 아니라 이를 실현하기까지 체계적인 정책이 뒷받침돼야 합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부분일 수 있지요.”
그의 욕심은 여기에서 한참을 더 나간다. 그동안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수업을 들으며 준비한 박사 논문도 곧 마무리 지을 계획이란다.
이는 물론 동시대인의 삶을 담아내는 살맛나는 도시를 만들기 위한 또 하나의 준비 과정일 뿐이다. 도시인의 오감만족은 그에게 던져진 영원한 숙제인 셈이다.
PROFILE
정재용씨는 1998년 서울시립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한 뒤 서울공대 도시설계협동 석사과정을 마치고 같은 대학 환경계획연구소에서 도시설계연구원으로 재직했다.
2002년 서울시 청계천복원추진본부 전략사업팀장을 맡으며 청계천 복원과 주변 지역 재개발 계획과 정책을 수립했다.
서울대 캠퍼스 마스터플랜, 포항공대 캠퍼스 마스터플랜, 분당 도시설계 재정비 사업이 그의 대표작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