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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구파 관료의 이유있는 물 사랑 - 환경부 상하수도국장 유영창
분야 산업기술/토목
환경기술.에너지/기타
날짜 2011-03-31
학구파 관료의 이유있는 물 사랑 - 환경부 상하수도국장 유영창
| 글 | 박근태 기자ㆍkunta@donga.com |


옛부터 치수(治水)는 나라 운영의 근본이었다. 아무리 엄한 군왕도, 학식 있는 학자도 물의 오묘한 섭리에 고개를 숙인다. 물을 다스리는 일에는 그래서 신중함과 책임감이 뒤따른다. 유영창 국장(52)은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물을 다스리는 이치에서 세상사는 지혜를 얻는다는 그의 삶을 들여다봤다.

훤칠한 체구에 깔끔한 인상, 조리있는 말투는 영락없는 학자풍이었다. 건설교통부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올해로 2년째 환경부 상하수도국장을 맡고 있다. 한때는 15조원의 정부 예산을 주무른 꼼꼼한 예산 기획가로, 기자들을 상대로 화려한 언변술사로 활약한 이력의 소유자지만 지금의 위치가 그에겐 가장 자연스럽다. 30년 넘은 물과의 인연 때문이다.
“물이요? 지긋지긋하죠.” 아련한 옛 기억을 되짚어가던 그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싱긋 웃는다.

사실 물과는 악연이었다. 청렴한 공직자 가정이었던 그의 집은 오랫동안 산동네와 저지대를 전전해야만 했다. 집안에 몇 안되는 남자라는 이유로 물 긷기는 언제나 그의 몫으로 돌아갔다. 당시만 해도 산동네에서 수돗물을 마신다는 것은 꿈에서도 상상할 수 없었다. 시큼한 악취를 맡아가며 오물을 공동 하수구로 퍼 나르는 것도 하루이틀이 아니었다. 번듯한 양옥에서 살게 됐어도 문제가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해마다 여름이면 지하실이 침수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하수가 원활히 빠지지 못해 역류해 올라오는 소위 ‘내수침수’라는 복병을 만난 것이다. 이쯤 되자 소년도 오기가 생겼다.

“밤새 물을 퍼내던 기억이 있어요. 물 부족에, 침수에 물이 주는 피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뼈저리게 느꼈어요. 어린 시절 혹독한 경험이었지만 한번 맞붙어 보자고 생각했죠.”
‘상하수도공학’이라는 이름도 낯선 학문에 뜻을 품은 것도 바로 이때부터라고 그는 얘기한다. 대규모 국책 사업이 봇물 터지듯 벌어지던 1970년대 당시만 해도 토목공학은 나라에서 꽤나 ‘대우받는’ 학문이었다. 게다가 중동 건설 붐까지 타자 나라 안 인재라는 인재는 토목공학으로 모여들었다. 모두가 한쪽만 바라보고 있는 사이 그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던 분야에 푹 빠져들었다.


정의감으로 시작한 공직 생활
 
   
 
 
그는 영락없는 공무원이다. 인터뷰 내내 그의 입에는 ‘정의감’이란 말이 자주 오른다. 청년시절 한동안 그는 샐러리맨 생활을 했다. 토목공학도 출신답게 ‘현장’에서 살아야한다는 생각에 취업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운명은 그를 지금의 자리로 돌렸다. 당시 한 건설사의 말단 엔지니어였던 그는 제 배불리기에 급급한 악덕 기업의 모습을 목격하곤 적잖게 실망했다고 한다. “꼴 보기도 싫었어요. 공공연히 부정과 비리가 벌어지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었죠. 좀더 정의로운 일을 하고 싶었어요.”곧바로 그는 기술고시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여러 대에 걸쳐 나라 일을 해온 가풍도 그의 결정에 순풍을 불어넣었다. 한번 한다면 하고 마는 근성 덕택에 그는 1980년 토목직 수석의 영예까지 움켜쥘 수 있었다. 비록 월급 수준은 일반 기업에 비해 턱없이 못 미치지만 마음은 편했다. 합격증을 받아든 그의 입가엔 웃음이 가득했다.
물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일까? 첫 발령지 역시 물과 관련한 업무를 담당하던 용수과였다. 공교롭게도 지금 그가 수장으로 있는 상하수도국의 전신이다. 정부 안에서 최고의 물 전문가로 통하는 그지만 ‘외도’ 경력도 화려한 편이다. 전문성도 중요하지만 폭넓고 균형 있는 시각을 갖춰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대통령 비서실 파견 근무는 아직도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전까지 우물안 개구리였죠. 상하수도 시설만 잘 관리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사회간접자본투자 기획을 하면서 나라 전체가 안고 있는 물 문제를 큰 시야에서 볼 수 있었어요.”물은 함부로 가둬서도, 흘려보내서도 안된다는 옛 선인의 가르침은 정말 맞는 말이었다. ‘큰 틀’에서 바라보지 않으면 자칫 국민의 생명은 위험에 놓일 수 있기 때문이다. 공직자로서도, 물 전문가로서도 ‘외골수’ 기질은 버려야 한다고 다짐했다. 물 외에 다방면으로 관심을 넓히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전문 관료가 되려면 이것저것 다양한 경험과 실력을 쌓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시 친정에 돌아온 그는 기술직 관료로서는 처음으로 부처 예산담당관으로 발탁됐다. 행정 관료들이 독식해온 부처 살림살이를 떠맡게 된 것이다. 극히 이례적인 인사였다. 특히 깔끔한 살림살이로 건교부를 정부 기관 가운데 가장 예산을 아껴 쓰는 부처로 올려놓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그는 이공계 출신의 공직 진출을 적극 권장한다. “이공계 전공자들은 체계화된 사고에 익숙합니다. 조직이 운영되는 방식이나 행정 체계에 쉽게 익숙해질 수 있죠.”
전문성과 추진력, 여러 가지 면에서 앞선다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정부 내 요직에 이공계 출신이 드물다는 것이 한계로 남아있다. 다른 분야에 무관심하고 독선적인 면도 없지 않다는 것은 이공계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꼬집는다. 하지만 이 모든 문제는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풀 수 있다고 그는 낙관한다.

 
   
 
 
“복잡한 일이 있으면 조용한 곳을 찾아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해요. 그러면 머리 속을 떠돌던 잡념들이 사라지고 생각도 명쾌해집니다.”그는 주변에서 아이디어맨으로 통한다. 25년 공직 생활 동안 그를 떠받쳐준 것은 명쾌한 판단력이었다. 도서관은 그가 잡념을 버리고 사고를 한데 모으는데 그만인 최상의 휴식처였다. 국장이 된 뒤로 거의 찾지 못하지만 집 근처 공립도서관을 나설 때면 그의 마음은 새털처럼 가벼워진다. 거물급 정치인들이 흔히 하는 ‘~구상’이랄 정도는 아니지만 그도 나름의 소박한 구상을 내놓는다.

‘도서관 구상’의 결과는 기대 이상의 효과를 발휘했다. 석사 논문으로 쓴 ‘하수처리장 최적 배치에 대한 연구’라는 논문은 실제 서울시 4개 하수처리장 위치를 정한 근거가 됐다. 바쁜 공직 생활 중에도 틈틈이 짬을 내 준비한 야심작이었다. 1991년 정부 정책 공모전에 내놓은 아이디어는 유국장의 평생 자랑이다. 당시 급부상하고 있던 정보기술을 이용해 하수처리장에서 발생하는 이상을 실시간 감지해 원인을 분석하자는 것이었다. 하수 전문가의 부족 원인을 찾던 중 우연히 떠오른 생각이었지만 반응은 꽤 좋았다. 지금은 보기에도 허름한 486급 컴퓨터로 밤샘 작업을 하며 얻어낸 결과였다.

솔직함은 그의 삶에서 그대로 우러난다. “수돗물에 대한 불신이 여전합니다. 수원지 물은 깨끗해졌는데도 말입니다. 하지만 그 말에도 일리는 있습니다.”온 나라 수도를 관장하는 수장으로서 너무나 솔직한 답변이다. 그래서 욕심도 앞선다. 남은 임기중 그는 모든 가정의 수질을 정부가 앞장 서서 관리하는 공개념을 서둘러 도입할 계획이다. 나노로봇이 수도관을 관리하는 ‘에코 스타’ 프로젝트도 임기내 성공리에 안착시켜야 한다. 현대판 뉴딜 정책으로 불리는 하수관리정비 종합투자계획에 집중된 국민들의 관심은 언제나 따가운 채찍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아침마다 스스로에게 기도하는 버릇이 생겼다. 국민의 공복(公僕)으로서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힘과 지혜를 달라고 기원한다. 최고의 관료는 전문가적인 식견과 넓은 포용력을 두루 갖춘 사람이라고 단언하는 유 국장. 그의 말에서 물의 섭리로 나라를 다스리는 이치를 깨달은 옛 선인의 예지가 엿보인다.



유영창 국장은
서울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하고 1991년 하수처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0년 기술고시 16회로 공직에 입문해 상하수도와 도로교통 분야를 넘나들었다. 특히 1992년 대통령 비서실 사회간접자본투자기획단 파견을 시작으로 건설교통부 예산담당관, 공보관 등 주요 요직을 거쳤다. 현재는 고위 공직자 교환근무제에 따라 환경부 상하수도국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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