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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D로 무지개 빛 미래 꿈꾼다 - 한국광기술원 원장 김태일
분야 정보기술.컴퓨터통신/디스플레이
정보기술.컴퓨터통신/유무선통신
날짜 2011-03-31
LED로 무지개 빛 미래 꿈꾼다 - 한국광기술원 원장 김태일
| 글 | 광주=이현경 기자ㆍuneasy75@donga.com |


빛고을 광주에서 빛의 혁명을 꿈꾸고 있는 사람이 있다. 세상의 모든 조명을 LED로 바꾸는 그날까지 LED 전도사를 자처하는 김태일 원장이 그 주인공. 그가 들려주는 만능 재주꾼 LED의 매력 속에 빠져보자.

“과학기술원 말씀이시죠잉.” 택시를 잡아 탄 기자가 광기술원을 가자고 하자 대뜸 기사 아저씨는 구수한 광주 사투리로 이렇게 말했다. “아니요, 과학이 아니라 광이요. 한국광기술원이거든요.” 인터넷에서 뽑아온 약도를 건네줬는데도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하신다. 결국 동료 기사와 전화 통화로 설명을 듣고 나서야 핸들을 돌려 차를 움직였다.


광소자를 평생 숙제로 찜
 
   
 
 
“광산업은 우리나라에서 스포트라이트를 제대로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한국광기술원 김태일 원장의 첫마디다. 택시 기사 아저씨가 잘 몰랐던 것이 이해가 갔다. 한국광기술원은 2001년 4월에야 개원했고, 지금 건물에 입주한 것도 지난해 11월이었다. 김 원장은 한국광기술원의 두 번째 원장이다.

“광기술은 기술의 로또라고 할 만 하죠. 이제부터 광기술 시대가 열릴 겁니다.” 이렇게 말하는 김 원장의 눈에서도 광채가 났다. 그의 확신은 한국광기술원을 이끄는 경영자로서 뿐만 아니라 광기술을 연구한 공학도로서 가지는 근거 있는 자신감이었다.

김 원장이 처음부터 광에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1973년 서울대 금속공학과(현 재료공학부)에 입학했다. 학부 졸업 후 KAIST에서 재료공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첫 직장은 자동차 회사였다. 이 때 까지만 해도 그는 광과 별 상관이 없었다.

그의 인생에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 것은 미국 유학길에 오르면서부터였다. 1982년 카네기 멜론대에서 재료공학으로 박사과정을 밟기로 결심하면서 세부 전공을 놓고 한참을 고심했다. 그는 지금 인기 있는 분야보다는 미래에 뜨게 될 첨단 과학을 하고 싶었다. 이렇게 선택한 것이 화합물반도체. 그는 광소자를 평생 숙제로 ‘찜’했다.

“제가 지도교수의 1호 제잡니다.” 당시 미국 내에서 화합물반도체는 막 붐이 일고 있는 유망 분야였다. 김 원장은 “아무것도 모르는 웬 동양 애가 화합물반도체를 해보겠다고 의욕을 보이니 지도교수가 기특하게 생각했었나 보더라”며 그 때를 회상했다.

1986년 그가 박사학위를 받자 미국에서는 화합물반도체가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었지만 국내는 화합물반도체보다 메모리반도체가 훨씬 각광받고 있었다. 미국에 남아 좀 더 광기술 실력을 갈고 닦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캘리포니아주 로스엔젤레스에 있는 광 기업 PCO에 들어갔다. 6년여 동안 장파장 레이저 다이오드, 포토다이오드 등 광통신 소자 연구개발에 매달리면서 광기술의 최전선에서 광의 매력에 푹 빠져 지냈다.


배짱과 뚝심의 ‘깡패’ 상사
그런 그가 한국행을 결심한 것은 아버지가 편찮으셨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도 광 연구를 하고 싶다는 그의 생각은 변함없었다. 1991년 삼성전자에 입사 후 그가 맡은 첫 번째 일은 화합물반도체부장으로 레이저 다이오드를 개발해 상용화하는 것이었다.
“개발 현장도 좋았지만 더 연구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더군요.” 1년 뒤 김 원장은 삼성종합기술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광전자 랩장을 맡아 60여명의 석박사 연구원들을 이끌고 적색 레이저, 청색 LED, 광통신 레이저 등 본격적으로 광소자 개발을 시작했다.

“연구원들은 아마 저를 깡패라고 불렀을 겁니다.” 김 원장이 웃으며 얘기했다. 그는 후배 연구원들에게 엄한 상사였다. 광 연구 만큼은 까다롭고 혹독하게 훈련을 시켰던 것. 술자리에서는 편한 선배였지만 일에서 만큼은 완벽을 기했다. 현재 국내에서 유명한 광기술 전문가 상당수가 당시 그와 한솥밥을 먹었던 사람들이다. “지금은 다들 광 분야에서 무림의 고수들이 돼 있죠.” 그는 은근히 후배 자랑도 덧붙였다.

삼성종합기술원에서 그는 놀라운 추진력을 발휘했다. 적색 레이저와 청색 LED를 개발해 삼성전기에 기술을 이전했다. 1999년에는 기술적으로 가장 까다로운 통신용 DFB 레이저 개발에도 성공했다. 그의 별명은 분명 이런 뚝심과 배짱을 빗댄 것이리라.
이 즈음 다시 삼성전자에서 그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삼성전자가 450억원 규모의 어마어마한 예산을 들여 삼성종합기술원에서 개발한 광통신 부품을 사업화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당연히 광기술 전문가가 필요했다.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연구에서 결과물을 얻었을 때 보람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거든요. 하지만 용기를 냈죠.” 그는 국내 광기술이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기초연구와 함께 응용도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뜻대로 모든 일이 술술 풀리지는 않았다. 2002년 ‘텔레콤 버블’이 사라지면서 광통신 관련 시장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광통신이 광산업의 대표 주자였고 광통신 시장의 붕괴는 광산업의 몰락으로 직결됐다. 그 역시 광통신에 집중하고 있던 터라 자연히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실패는 쓰더군요. 하지만 얻은 것도 많았습니다.” 그는 초심으로 돌아가 광기술을 다시 한번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한국의 ‘대박’ 산업인 휴대폰, 디스플레이 등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도 광이 있었다. 자동차와 신호등도 새롭게 보였다. 역시나 그곳에도 광이 있었다. 앞으로 그가 해야 할 일을 찾은 것이다.


LED 조명이 주름잡는 그날까지
 
   
 
 
“왜 모든 조명이 형광등과 백열등이어야 하죠?” 김 원장은 이렇게 반문했다. 그러고 보니 주변은 온통 형광등과 백열등 천국이다. 그는 원장실 책상 위에서 기판을 가져와 직접 버튼을 누르며 적색, 녹색, 청색 LED를 보여줬다.
“적색, 녹색, 청색 LED만 있으면 모든 색을 만들 수 있습니다. 형광등과 같은 백색광은 물론이고요.” 그제서야 감이 잡혔다. LED를 조명에 활용하는 것. 그는 고휘도 LED에서 광기술의 미래를 찾은 것이다. 오랜 세월 몸담았던 곳을 떠나 한국광기술원을 택한 것도 그의 이런 꿈을 펼치기 위해서였다.

“휴대전화 자판을 보세요. LED 후광조명이 있습니다. 요즘 도로에서 LED 신호등도 보셨죠?” 그는 이것이 LED의 매력이라고 강조했다. 원하는 곳 어디나 적재적소에 활용할 수 있는 것이 LED라고. 게다가 밝게 비춰야 하는 것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그 종류가 많다.
“감성조명도 가능합니다.” 그는 색깔에 따라 따뜻한 조명, 차가운 조명, 안정감을 주는 조명 등 감정에 따라 조명을 다르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유럽에서는 자동차 계기판이 속력에 따라 색깔이 바뀌도록 ‘장난’을 치기도 한다.
그는 “뭐니 뭐니 해도 LED 조명의 가장 큰 장점은 반영구적인 수명”이라고 강조했다. 신호등이 고장 날 염려가 없고, 자동차 계기판을 뜯어내야 할 필요도 없다. 또 LED 조명은 백열등의 1/4, 형광등의 절반 밖에 에너지를 쓰지 않는다.

그는 “우리나라 전체 전기 소비량의 12%가량이 조명으로 쓰이는데, LED 조명으로 바뀔 경우 이 비율이 5%까지 낮아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할 수만 있다면 세상의 모든 조명을 LED 조명으로 바꾸겠다는 야심도 갖고 있다.
일단 한국에서는 시도해 볼 만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한국은 휴대전화, 디스플레이, 옥외 전광판, 자동차 등 LED 조명의 내수시장이 크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 국산 기술로 조달되는 LED 조명은 40% 정도에 불과하다”면서 “앞으로 미국, 일본, 독일 등에서 수입되는 고품질 LED를 국내 광기술로 충당한다면 금상첨화”라고 말했다.

한국광기술원은 주변에 광주과학기술원, 한국전자통신연구원 광통신연구센터 등 광산업 관련 연구기관들과 함께 ‘광 밸리’를 형성하고 있다. 광 밸리를 크고 튼튼하게 키울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도 한국광기술원장인 그의 몫이다.

“공학은 부를 창조하는 직업입니다.” 그는 예비 공학인들을 위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직업이란 무릇 자신의 성향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당연하지만 ‘공돌이’가 되면 위험부담이 있더라도 새로운 일에 도전해 그 결과로 부를 얻을 수 있는 매력적인 직업이라고.


김태일 원장은 서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1986년 미국 카네기 멜론대에서 재료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1년부터 삼성전자와 삼성종합기술원에서 화합물 반도체부장, 광전자랩장, 재료디바이스 연구소장, 광전자사업팀장 등을 거쳐 지난해 6월 한국광기술원장으로 부임했다. 광통신 패키징 관련 특허를 3편 출원했고, 1999년 뉴미디어 기술대상과 2002년 장영실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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