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방미인 생체재료 디자이너 - KIST 권익찬 박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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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방미인 생체재료 디자이너 - KIST 권익찬 박사 | 글 | 임소형 기자ㆍsohyung@donga.com |
부작용 없는 항암제 전달 시스템 개발 그때그때 맡은 일을 책임감 있게 해내던 한 청년이 있었다. 이제 뒤돌아보니 그 일들이 청년을 명실공히 생체재료 전문가로 이끌었다. 10년 후를 내다보며 지금도 주어진 길을 담담히 걷고 있는 그의 연구인생 얘기를 들었다. ‘섬유공학에, 약학에, 생체재료공학까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권익찬 책임연구원을 만나기 전 그의 약력을 살펴보니 놀랍게도 이 3가지 분야가 모두 적혀 있었다. 언뜻 보면 섬유공학, 약학, 생체재료공학이 도대체 서로 무슨 관계가 있을까 싶었다. 이런 궁금증을 안고 KIST 의과학연구센터에 있는 권 박사 연구실을 찾았다.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고 에너지가 넘치는 모습일 거라고 상상했는데, 의외로 권 박사는 차분하고 조용한 타입이었다. 그에게 한번에 세 분야에 모두 몸담게 된 사연부터 물었다. 마치 그렇게 물을 줄 짐작했다는 듯 허허 한번 웃고 나더니 권 박사는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했다. 고분자로 만든 생분해성 수술실과의 만남
그래서 과학자들은 항암제를 담아 암세포에만 실어다 나르는 운반체를 생각해냈다. 만약 스티로폼 같은 폴리스티렌으로 된 운반체에 항암제를 담아 몸 안에 넣는다고 가정해보자. 우리 몸은 이를 외부에서 침입한 이물질로 생각하고 항암제가 효과를 발휘하기도 전에 간으로 보내 분해시켜 버릴 것이다(물론 폴리스티렌은 분해조차 잘 되지 않겠지만 말이다). 따라서 운반체는 아무런 면역거부반응 없이 몸 안을 돌아다닐 수 있는 재료로 만들어야 한다. 이를 생체재료라고 한다. “암 조직 주변에는 새로운 혈관이 많이 만들어집니다. 다른 혈관과 달리 이런 신생혈관에는 항암제를 담은 생체재료가 잘 스며 들어가죠. 그런 다음 생체재료가 분해되면서 항암제가 흘러나와 암을 치료하는 겁니다.” 생체재료는 세라믹, 금속 또는 고분자물질로 만든다. 권 박사는 1982년 서울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고분자화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기에 때마침 생체재료 연구를 접할 기회를 얻었다. 스스로 분해되는 수술용 봉합사를 개발하고 있던 KIST 고분자연구부에 1984년 입사하게 된 것. 수술용 봉합사는 수술부위를 꼬매는 실이다. 수술부위가 아문 후 실을 제거하려고 또다시 수술하는 번거로움을 덜기 위해 당시 KIST 연구팀은 저절로 분해돼 없어지는 생분해성 고분자물질로 수술용 봉합사를 만들던 중이었다. “내가 입사했을 때는 개발을 시작한지 2-3년 정도 지난 시기였죠. 봉합사의 원료로 쓸 고분자를 어떻게 정제하고 합성할지는 거의 결정된 상황이었어요. 실제로 실을 뽑아 물리적, 화학적 성질을 확인할 차례였죠. 그런데 바로 그 ‘실을 뽑는’ 일이 내게 맡겨졌지 뭡니까. 섬유공학과 출신이라고 말이죠.” 당시를 회상하는 그의 표정에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역력하다. 그의 전공은 고분자화학이었지 방사공정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전공이 아니라고 마다할 수 있었을 텐데도 그는 일단 부딪쳐보자는 생각으로 다른 회사의 선배들을 찾아갔다. “결국은 실을 뽑는 장치를 하나하나 배워가면서 내 손으로 직접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해서 될 일이 아니었어요. 생분해성 봉합사는 옷 만드는 실과 다르잖아요.” 몸 안에 들어간 생분해성 고분자는 물이 들어가 가수분해되면서 스스로 없어진다. 보통 실을 뽑으려면 높은 압력에서 온도를 100℃ 이상으로 올려야 한다. 그러니 수분이 적은 양만 있어도 금방 수증기로 변해 실 전체에 퍼진다. 봉합사가 반 정도 분해된 상태로 뽑히거나 아예 전부 분해돼버리기 일쑤였다. 급기야는 개발에 참여하고 있던 삼양사에서 다시 봉합사를 뽑기 위해 여러 전문가들을 모아 태스크포스팀을 꾸렸다. 결국 1995년이 돼서야 삼양사에서 수술용 봉합사를 본격적으로 생산하게 됐다고. 권 박사와 생체재료공학과의 인연은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시작됐다. 약물 운반체 연구로 약학과 인연 맺어
이렇게 해서 그의 약력에는 고분자화학, 생체재료공학, 약학이 모두 등장하게 된 것이다. 권 박사의 발자취를 가만히 따라오다 보니 그때그때 주어진 일들이 하나같이 그를 생체재료 연구자로 이끌기 위해 마련돼 있던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약학박사 학위를 받은 1993년 7월 KIST에 의과학센터가 설립됐다. 여기서 마침 생체재료를 이용한 약물 전달 시스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 권 박사는 1994년 선임연구원으로 의과학센터에 합류했다. 그는 축농증을 치료하는 항생제 운반체 개발에 뛰어들었다. 축농증은 코 안쪽의 빈 공간인 비강에 염증이 생기는 병인데, 치료하기 쉽지 않다. 비강에는 혈관이 없어 항생제를 먹어도 잘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연구팀은 200μm 크기의 생분해성 고분자로 된 운반체를 고안했다. 여기에 항생제를 담아 튜브를 이용해 비강으로 넣어주는 것이다. 그러면 고농도의 항생제가 비강에 직접 들어가므로 치료가 훨씬 수월해진다. “동물실험까지 마치고 상업화 직전 단계까지 진행됐습니다. 그런데 기술을 이전한 회사 측에서 추가 임상시험에 드는 비용과 축농증 시장 규모를 비교분석해 보더니 생산하기 어렵겠다고 최종 판단하더군요.” 그의 말에서 오랜 노력이 상업화의 결실을 보지 못한데 대한 안타까움이 배어난다. 진단과 치료에 모두 쓰일 생체재료
이제 명실공히 생체재료공학 전문가의 반열에 오른 그에게도 어려움은 있다.“소재가 한정돼 있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플라스틱으로 장난감을 만들 경우 소재가 무궁무진하잖아요. 그런데 어린이가 입으로 빨아도 괜찮은 장난감을 만들라고 하면 선택할 수 있는 소재가 제한되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몸 안에 들어가도 안전하다고 알려져 있는 재료만을 여러가지로 조합해보면서 원하는 성질을 구현해내야 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체재료공학을 연구하는 이유를 묻자 지금까지 조용조용 얘기하던 그의 목소리 톤이 한층 올라간다. “생체재료공학의 전망은 밝습니다. 약이 질병 부위에만 작용하는 ‘기능성’을 갖도록 개발되는 추세니까요. 각 약물에 알맞은 생체재료를 만드는 게 그만큼 중요해질 겁니다.” 권 박사는 2003년 8월부터 생체적합성 유·무기 입자 소재 연구단을 이끌고 있다. 연구단은 약물 운반체에 쓰이는 생체재료뿐만 아니라 조직 재생에 쓰이는 생체재료도 개발 중이다. “연골이 닳아서 없어지면 다른 연골조직의 세포를 떼어내 성장에 필요한 단백질과 함께 생체재료에 담아 주사하는 거죠. 그럼 연골이 재생될 수 있어요.” 생체재료로 인공장기를 만들 수도 있다. 페트병의 원료인 폴리에틸렌테레프탈레이트(PET)는 인공혈관을, 신축성이 좋은 폴리우레탄은 인공심장을 만드는데 이미 사용되고 있다. “질병을 진단하는데도 생체재료가 활용될 겁니다. 예를 들어 생체재료에 형광물질이나 금속을 붙인 다음 몸 안에 넣어 암 조직을 찾아가게 하면 암이 어디에 얼마나 자라고 있는지 판단할 수 있죠.” 권 박사는 생체재료가 실제 치료나 진단에 활용될 수 있기까지 앞으로 10년 정도가 걸릴 것으로 내다본다. 이 10년이 그를 위해 마련된 또다른 길인 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