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에서 역사를 본다 - (주)한화건설 김현중 사장 |
건축 현장 기사에서 최고경영자까지 |
| 글 | 강석기 기자ㆍsukki@donga.com |
30년간 건축에 몸담아오면서도 늘 자신이 행운아라고 생각하는 사람.
국내외 현장을 누비며 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짓는데 평생을 바친
김현중 사장의 열정적인 삶과 그의 건축 철학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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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설계도를 펼쳐놓고 보거나 공사현장을 둘러보면 온몸에 전율을 느낍니다.”
희끗희끗한 머리에 이웃 아저씨 같은 푸근한 인상의 김현중 사장은 건축과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자 점차 말이 빨라졌다.
1950년 생인 그는 전쟁의 상흔이 채 아물지 않은 어려운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렸을 때는 법관이 되는 꿈도 꿨지만 집안에 이과에 진학한 사람들이 많아 자신도 공대를 택했다고.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 서울대에는 공업교육과가 있었는데 전 건축전공을 택했죠. 하지만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유신을 전후한 시대라 캠퍼스는 데모로 늘 시끌시끌했죠.”
우여곡절 끝에 대학을 마친 그는 1976년 대우개발에 입사해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설계사무실에 취직할까도 생각했지만 당시는 대기업에 비해 처우가 낮아 결국 발걸음을 돌렸다. 그가 맡은 첫 임무는 당시 호텔로는 최대규모인 을지로 롯데호텔 공사현장. 36층, 1000실 규모의 호텔 공사는 1979년에야 끝났는데 그는 이 기간동안 너무나 많을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때는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두사람이 교대로 철야작업을 했는데 아내가 첫애를 낳은 다음날도 공사현장으로 달려나갔죠.”
지금도 김 사장은 롯데호텔의 구조를 호텔직원들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한다. 롯데호텔에서 모임이 있을 때는 김 사장이 안내자로 나서 아래 직원들이 민망해할 정도다.
“호텔이 완공되고 나서 구경도 시켜드릴 겸 부모님과 장인장모를 모시고 저녁식사를 했는데 상당한 금액이 나왔습니다. 당시 절 알아보고 특별 할인을 해주던 지배인의 웃는 모습이 지금도 선하네요.”
해외건설에 바친 20년
1981년 김 사장은 해외 공사현장에 파견된다. 북아프라카 리비아에 1만3000세대의 주택과 학교 200동을 짓는 대규모 프로젝트에 참여한 것. 거친 환경이었지만 그는 타국에서의 일과 삶을 즐기는 자신을 발견했다. 외국인과 일하는데 유능하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1984년 영국 런던에 파견된 그는 그곳에 사무실을 열고 해외공사자재구매를 담당하게 된다. 김 사장의 유창한 영어실력은 이때 다져졌다.
“약 10년 동안 공사현장에서 쌓은 경험이 업무를 파악하고 진행하는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현장에서 원하는 자재를 찾아 좋은 조건에 구매하는 노하우를 갖게 됐죠.”
1987년 귀국한 김 사장은 해외부동산개발사업을 맡아 2000년까지 지구촌을 누비며 한국건설의 깃발을 꽂았다. 지금까지 업무차 가본 나라가 50여개에 이르고 비행거리가 300만 마일은 될 것이라고.
“외국을 다니다보면 그 나라의 건축물이 눈에 들어옵니다. 결국 건축물을 구경하는 것이 관광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인지 김 사장은 ‘건축은 역사’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관련분야의 종사자는 역사를 창조한다는 자부심과 함께 책임감도 늘 함께 지녀야한다는 것. 이 때문에 그가 가장 중요하게여기는 것은 ‘프로페셔널리즘’이다.
김 사장은 최근 건축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연설을 몇차례 했는데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학생들 다수가 졸업후 설계나 시공보다는 부동산개발 쪽으로 진출하기를 희망했기 때문.
“돈이 최고라는 잘못된 의식에 오염된 것 같아 씁쓸했습니다. 개발이나 경영을 하기에 앞서 먼저 자기분야에서 전문성을 높여야해요. 그러자면 실제 현장경험이 필수입니다.”
김 사장은 건축학도들이 설계도면과 머릿속에만 그려져 있는 건축물을 눈앞에 실현시켰을 때의 희열을 맛보기를 바란다.
2000년 한화그룹은 (주)한화의 건설부문을 따로 떼어 (주)한화건설을 만들고 초대사장으로 그를 영입했다. 당시 건설부문의 매출액은 4000억대였고 직원은 400여명. 한 회사의 리더가 된 그는 그동안의 경험과 노하우를 최대한 발휘해 불과 4년 만에 매출액 1조원을 달성하고 직원수도 두배인 800명으로 늘렸다.
올 봄에 완공된 서울역사도 이 회사의 작품. 서울의 관문임을 고려해 로비를 최대한 넓고 높게 만든 이 건물은 유리의 시원함까지 겹쳐 보는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하고 있다.
“서울역사 로비에 들어서서 오른쪽을 보면 공사참여자들의 명단이 있습니다. ‘시공책임자 : 김현중’이라는 글씨를 본 순간 평생 직업으로 건축을 택하기를 정말 잘했구나 라는 뿌듯함이 가슴에서부터 퍼져 나오더군요.”
흐뭇한 웃음을 띠던 김 사장의 표정이 다시 진지해진다.
“건축은 일반 제조업과는 다른 면이 있습니다. 우선 공장이 없어요. 굳이 말한다면 공사 현장이 곧 공장이라고 할까요. 또 나오는 제품 가운데 같은 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 하나가 작품인 셈입니다.”
최근 김 사장은 환경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건축물이란 결국 사람이 좀더 쾌적한 환경에서 지낼 수 있게 해주는 게 존재이유이기 때문.
“사회 일각에서는 건설업계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물론 건설로 환경이 파괴된 경우도 있지만 일부의 부작용이 과장·왜곡된 측면도 있지요.”
김 사장은 부임한 뒤 ‘환경연구소’를 세워 물과 공기를 깨끗하게 유지하는 방법을 다각도로 연구하게 하고 있다. 이곳에서 개발한 하수처리 시스템은 현재 6곳의 하수처리장에서 적용되고 있다. 최근에 문제가 되고 있는 ‘새집증후군’에 대한 해결책으로 인체에 무해한 건축자재를 개발하고 일반 아파트에 환기시스템을 도입하는 연구도 진행하고 있다.
요즘 김 사장은 자신도 모르게 창 밖을 자주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 건물 바로 옆에서 청계천 복원 공사가 한창이기 때문이다.
“이 공사가 완성되면 청계천 일대는 세계적인 관광지가 될 겁니다. 우리는 지금 역사를 창조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겁니다.”
젊어서는 하루걸러 밤샘을 해가며 일에 파묻혀 살았던 김 사장은 그래도 자신을 늘 행운아라고 생각한다.
“건축은 힘든 분야입니다. 하지만 그만큼 성취감도 크지요.”
정해진 시간을 30분이나 넘기며 열변을 토했던 김 사장은 작별의 악수를 나누자마자 쌓여있는 서류더미로 손을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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