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양문화재단 이사장 정석규 |
고무인생 50년 사회봉사 40년 |
| 글 | 허두영 기자ㆍhuhh20@dong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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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부족함을 모르고 자라는 학생들이 많다. 부모와 어른들이 사회 곳곳에서 가르치는 건 ‘모으는 방법’에 치중된 것처럼 보인다.정석규 신양문화재단 이사장을 만나면 돈을 버는 방법과 함께 돈을 쓰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비나 눈이 오지 않고 특별히 덥거나 춥지 않은 평일 아침이면 서울대 후문이 있는 낙성대 쪽에서 가파른 고개를 올라 서울공대 신양학술정보관까지 이르는 오르막을 지팡이를 짚고 자분자분 걸어 오르는 노인을 볼 수 있다.
올해(2006)로 희수(喜壽, 77세)를 맞는 정석규 이사장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승용차로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를 이렇게 40분 동안 걸어서 출근하고 퇴근한다. 놀라운 것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체력이 아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암으로 후두와 위를 완전히 잘라낸 상태에서 보여주는 정신력이다.
“건강할 땐 75kg까지 나갔지. 수술을 3번이나 해서 지금은 55kg까지 빠졌어. 그래도 일을 하고 계속 움직여야지. 가만히 있으면 지루해.” 후두가 없어 말을 하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그가 목에 붙인 장치에 손가락을 대고 입을 열자 쇳소리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요즘 젊은 사람은 5분 걷는 것도 싫어서 택시를 탄다니깐…”
쌀이 없어 죽을 끓여 먹고 달걀 하나 쪄서 여섯 식구가 나눠 먹을 정도로 굶주림에 익숙한 그였지만, 한국전쟁 때 피난 못 가고 서울에 숨어 살던 가운데 배고픔을 참지 못해 거리로 나왔다가 인민군에 끌려 갔던 기억이 아직도 처절하다. 그 때 깨달은 진리가 바로 ‘무인불승’(無忍不勝), 곧 ‘참지 못하면 이기지 못한다’다. 배고픔을 참지 못해 죽을 뻔했기 때문이다.
정 이사장이 고무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45년. 당시 부산공업학교 3학년이던 그는 학도동원령으로 군수제품을 생산하던 조선고무벨트회사에 끌려가 굶주림 속에 밤낮 없이 강제노동을 해야 했다. 고무처럼 질긴 인연 때문일까? 정 이사장은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서도 고무 분야에서 떠나지 못했다.
“당시 화공과가 제일 유망했어. 화학비료, 석유화학, 시멘트…. 당시 대기업들도 화학공업으로 경제를 일으키고 있었지. 그런데 난 졸업한 뒤 바로 고무공장에 취직했지. 공대 출신으로는 처음이야. 아무도 고무공장에 가려고 하지 않았어.”
학도동원으로 강제노동만 했지 기술을 전혀 배우지 못했던 그는 당시 한국의 고무기술 수준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보생산업에 취직해 신발과 타이어를 비롯해 전자부품용 특수고무까지 온갖 종류의 고무 기술을 개발하고 생산하는데 주력해왔다. “지금 우리나라 고무산업은 세계 6위 규모를 자랑하지만, 자동차 타이어 같은 분야를 제외하면 기술은 일본에 비해 30년 정도 뒤져. 다들 어렵다고 공부를 기피해. 서울공대에도 고무를 연구하는 교수가 하나도 없어. 쯧쯧…”
정 이사장은 개인 자격으로 가장 많은 돈을 모교에 희사한 동문이다. 지금까지 서울대총동창회, 공대연구재단, 서울대 발전기금 등의 형태로 65억원을 냈고, 자신의 호를 딴 신양문화재단도 사후(死後)에 서울대에 넘기기로 했다. 또 신양문화재단을 비롯해 서울대총동창회, 한국고무학회, 한국로타리장학재단 등을 통해 1991년부터 지난해까지 435명에게 모두 8억5천만원이 넘는 장학금을 지원했다. 지난 2003년 발간한 회고록의 제목으로 달린 ‘고무인생 50년, 사회봉사 40년’이 단지 시간과 돈으로만 쌓은 게 아니다.
산수(傘壽, 8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정 이사장은 하고 싶은 사업이 아직도 많다. 인문학의 발전에도 기여하기 위해 서울대에 제 2의 신양학술정보관을 짓고, 고무기술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공업용 ‘고무탄성체 편람’을 발간하며, 고무산업을 진흥하기 위해 한국고무회관을 설립하는 것이다.
정 이사장의 안타까움은 젊었을 때 좋아하던 등산과 수영을 못하는 게 아니다. 흥이 날 때 멋들어지게 부르던 가수 배호의 ‘안개낀 장충단공원’이나 ‘돌아가는 삼각지’를 흥얼거릴 수 없게 된 것도 아니다.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그의 쉰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자.
“요즘 학생들은 은혜를 몰라. 작년까지 435명이 장학금을 받아갔는데, 고맙다고 인사하러 오는 사람 거의 없어. 나야, 사교성도 없는 외로운 늙은이라 상관없지만, 다른 장학재단도 다 그렇다고 들었어. 그렇게 공부해서 어디에 쓰겠어? … 아무리 그래도 장학사업은 계속 해야지. 내가 인사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잖아…”
Profile
1952년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보생산업에 입사한 뒤, 1965년 한국고무학회를 창립하고 2년 뒤 태성고무화학을 설립해 고무 기술개발과 제품생산에 평생을 바치면서 한국 고무산업의 기반을 닦았다. 1998년 고희를 맞아 신양문화재단을 세워 신양학술정보관 건립, 신양공학학술상 제정, 신양의학연구기금 출연, 사회정보학 교수 초빙기금 조성, 엔지니어하우스 건립 지원 등의 사업을 통해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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