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도 인생도 살면서 완성되는 미완의 건축 |
땅과 이야기하는 건축가 승효상 |
| 글 | 장경애 기자ㆍkajang@donga.com |
건축은 예술, 공학, 인문학 지식이 어우러진 고도의 문화 행위다.
건축가는 다른 사람의 삶에 관심과 애정을 갖고 존경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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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은 집을 짓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집은 하부구조이며 그 집 속에 담기는 우리들의 삶이 그 집과 더불어 건축이 된다. 그러하다. 우리의 삶을 짓는 것이 건축의 보다 분명한 뜻이라는 것이다. … 건축은 우리의 삶이 지혜를 통과하면서 지어져 나가는 것이다. 이를 결코 손으로 세울 수 없을 것이다.”
이로재(履露齋) 건축 승효상 대표는 건축(architecture)과 건물(building)을 혼동하며 심지어 집을 부동산의 가치로만 여기는 사람들을 향해 ‘사는 방법을 만드는 일이 건축’이라며 일갈한다.
모든 건축물은 땅 위에 지어진다. 땅은 자신만의 고유한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주변 다른 땅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말이다. 그는 이러한 땅의 성격을 잘 파악하는 일이 건축가의 첫 임무라고 여긴다.
“설계를 요청받았을 때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바로 건축이 들어설 땅을 보러 가는 일입니다. 땅을 보지 않고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요”라며 땅과 처음 대면할 때가 건축가로서 가장 떨리는 순간이라고 말한다.
고객의 요구보다 땅이 가지고 있는 욕망에 귀 기울이는 건축가 승 대표. 실제로 그의 건축은 그 땅에 맞는, 그 땅을 지나는 사람들을 배려한 것으로 유명하다. 예를 들어 서울 동숭동에 있는 대학로 문화공간은 1층을 건물 앞뒤 길을 연결하는 통로로 개방해 소통을 강조했다. 또 샘터 파랑새 극장의 1층을 사람들이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비싼 1층을 대중에게 선사한 셈이다.
승대표는 ‘빈자의 미학’을 설파하는 건축가로도 유명하다. 여기서 ‘빈자’(貧者)란 가난한 사람이란 뜻이라기보다 가난할 줄 아는 사람을 의미한다. “건축주는 비교적 부유한 사람들이죠. 돈이 있더라도 가난할 줄 알고 절제할 줄 아는 삶이 돋보이는 거 아닙니까?” 건축이 갖고 있는 공공성을 이해하는 건축주만이 빈자의 미학을 구현할 수 있다는 말이다.
‘빈자의 미학’에 영향을 준 것은 어린 시절을 보낸 6.25전쟁 직후의 부산 골목길과 기독교. 개인적인 공간을 나누면서 동시에 공동체 삶을 이뤄나가는 ‘빈자’의 공간 활용과 독실한 기독교인이던 부모님과 교회에서 배운 절제와 검약이 오늘날 그의 건축이 보여주는 절제, 비움, 나눔의 미학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그의 대표적 건축물로 소개되는 서울의 ‘웰콤시티’는 건물 4채를 서로 연결하면서도 빈 공간을 만들었다. 주변 동네가 공간을 통해 건물 너머 자연경관을 나눠 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건축=예술+공학+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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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콤시티 1999 : 승효상 대표의 대표적 작품. 각 건물 4채가 서로 연결되면서도 사이에 빈 공간을 만들어 줌으로써 주변 동네에서 공간을 통해 건물 너머 자연경관을 나눠 볼 수 있도록 했다. |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직업이면서 앞으로도 가장 오래 남게 될 직업이라는 건축가. 건축가는 예술가인가 공학자인가? 이 물음에 승 대표는 “조형물로 나타나고 기술도 적용되지만 건축은 기술도 아니고 예술도 아니다”며 건축가를 예술가나 공학자의 영역에 가두는 것을 거부한다. “인문학이 포함되지 않은 과학은 창조적이지 않고, 과학적이지 않은 예술은 허무하다”면서 건축은 예술, 공학, 인문학 지식이 어우러진 고도의 문화 행위라고 설명한다.
그는 건축가는 다른 사람의 삶에 관심과 애정을 갖고 존경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 다른 사람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소설, 삶이 어떻게 흘러가는가를 보여주는 역사, 왜 그렇게 되는가에 대한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 철학에 눈을 떠야 한다고 강조한다.
건축가에 대한 이런 그만의 철학은 개인적인 성장과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는 초등학교 2학년부터 만화에 푹 빠져 지냈다. 한번 본 만화는 거의 다시 그려냈다. 만화가가 될까 봐 부모님이 걱정할 정도였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책에 몰두했다. 도서부원이었는데 학교 도서실에 있는 책이란 책은 모두 다 읽었다고 느낄 정도였단다. 고등학교 때는 종교적 사춘기를 보냈다. ‘신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신학자가 될 생각도 했다. 물론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다. 집착, 몰두, 방황 끝에 타협한 곳이 바로 서울대 건축공학과다. 하지만 유신독재 시절이던 그의 대학 생활은 암울한 회색빛일 뿐이었다.
삶을 변화시키는 건축
대학을 졸업하면서 그의 인생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대한민국 대표 건축가라 불리는 고 김수근 선생의 ‘공간’ 건축 문하생으로 들어가게 된 것. 몇 개월에 한번씩 ‘월급기념일’만 있었지만, 1년 365일 밤을 새며 일했지만 15년 동안 고 김수근 선생과 치열하게 토론하며 만들어낸 건축에 대한 혼은 현재 승효상 건축의 큰 축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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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함께 한 다섯 살 때의 승 대표. 아버지가 카메라를 해부했다고 한참을 야단치신 뒤 사랑으로 꼭 안아주신 모습이 담겨 있다. |
김수근 선생이 돌아가신 뒤 ‘이로재 건축’의 문을 연 승효상 대표는 이제 자신만의 건축세계를 대한민국은 물론 세계에 심고 있다. 2002년 중국 베이징 장성주거단지 클럽하우스를 설계했고, 2005년에는 베이징 짜오와이 소호상업지구 국제공모에 당선됐다. 그는 “외국에서 건축을 설계하는 것은 한국 건축가가 지닌 지식의 총체를 전달한다는 의미”라며 “중국과 일본에 설계한 건축은 나 개인의 특별한 감성과 철학은 물론 한국적인 미학을 전달한다는 자부심을 가질 만한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승 대표는 자신이 설계한 건축물에 자주 들른다. 1977년 설계한 마산 성당에 들렀을 때 일이다. 어두운 표정의 한 여공이 성당에 들어갔다. 잠시 뒤 여공은 평화로운 모습으로 성당을 나왔다. 승 대표는 이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건축이 한 사람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건축이 사람을 바꾼다고 믿는다. 부부가 닮는 이유도 같은 공간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승효상 대표는 작업실에 걸려있는 현판 ‘履露齋’를 잠시 바라보며 들릴듯 말듯 한마디를 흘린다.
“건축의 운명은 이슬처럼 잠시 땅에 덧대는 것, 언젠가는 없어지는 것이지요.”
P r o f i l e
1952 출생 / 1971 서울대 건축공학과 입학 / 1974 ‘공간’건축의 김수근 문하생으로 들어감 / 1989 건축연구소 ‘이로재’ 설립 / 1988~1999 영국 북런던대 객원명예교수 / 2002 미국건축가협회 명예펠로
주요 작품 1992 수졸당(서울) / 1998 수백당(남양주) / 1999 웰콤시티(서울) / 2002 최가철물점 쇳대박물관(서울), 2002 장성주거단지 클럽하우스(중국 베이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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