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일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 |
영원한 세라미스트 |
| 글 | 주원효 서울대 재료공학부 2년 ㆍtemplerjoo@naver.com |
지난 2004년 세계적 권위의 ‘훔볼트 연구상’ 수상자로 서울대 재료공학부 유한일 교수가 선정됐다. ‘나노이온공학’이라는 새로운 학문분야를 개척한 그의 공로를 세계가 인정한 결과였다. 30여 년간 세라믹 소재 분야에서 한 길을 걷는 그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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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더 훌륭한 교수님이 많이 계실 텐데….” 서울대 재료공학부 유한일 교수는 연구실에 들어선 기자를 특유의 환한 미소로 맞으며 이렇게 첫 인사를 건넸다. 책과 논문으로 쌓여 있는 연구실은 발 디딜 공간을 찾기 힘들었다. 30년이나 차이 나는 제자의 어떤 질문에도 친절히 설명하는 그의 모습에서 깊은 감동이 밀려왔다.
이온을 내 맘대로 움직인다
유 교수의 주된 연구 분야는 고체이온공학이다. 그는 “이온공학은 생소한 분야지만, 전자공학에서 전자를 이온으로 바꿔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고 말했다. 전자공학이 ‘전자 이동을 제어하고 응용하는 학문’이듯 고체이온공학은 ‘이온 이동을 제어하고 응용하는 학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유 교수는 “세라믹 소재는 전자와 더불어 이온 이동을 제어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차세대 고청정발전용 연료전지로 꼽히는 ‘고체산화물 연료전지’(SOFC)에 관심이 많다. SOFC는 전해질과 전극으로 구성되는데, 전해질 소재는 이온전도도가 크고 전자전도도가 적어야 하며 전극 소재는 이 둘이 모두 높아야 한다. 그는 세라믹 소재의 전자전도도와 이온전도도를 제어하는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유 교수는 또 고체이온공학을 나노미터(1nm=10-9m) 수준까지 적용하는 ‘나노이온공학’에 관심이 많다. 특정한 물질을 nm 크기로 줄이면 통상의 크기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독특한 특성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전자전도체 물질을 nm 크기로 만들면 이전의 특성을 잃고 이온전도체가 되기도 하며 그 반대의 경우도 일어난다.
그는 또 삼성전기와 산학협력으로 설립한 ‘세라믹수동소자연구센터’의 센터장으로서 ‘적층형 세라믹 축전기’(MLCC)의 작동신뢰성을 향상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보통 세라믹 유전체층의 두께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얇아지면 통상의 크기에서는 나타나지 않던 이온이나 전자가 이동해 여러 가지 현상이 일어난다. 그는 “이런 현상은 소자의 작동신뢰성과 수명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주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과학계 정설 뒤집은 Ti3SiO2
유 교수를 이야기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소재가 Ti3SiO2다. 그는 Ti3SiO2의 탄생 비화를 묻는 기자에게 “그저 우연한 기회에 남들이 보지 못한 사실을 봤을 뿐”이라며 겸연쩍어 했다. Ti3SiO2는 1960년대에 이미 알려진 물질이었지만 합성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오랫동안 같이 연구해온 미국 드렉셀대의 미셸 바숨 교수와 함께 Ti3SiO2를 합성하는 데 성공했고 Ti3SiO2의 여러 특성을 밝혀냈다.
그는 Ti3SiO2가 상온에서 800K(약 527℃)에 이르는 매우 넓은 온도 범위에 걸쳐 열기전력이 0이 되는 현상을 발견했다. 열기전력이란 어떤 물질에서 온도 차이에 의해 생기는 전압을 뜻한다. 초전도체를 제외하면 열기전력이 0인 물질은 없다는 게 과학계의 정설로 통했다. 하지만 그는 2000년 10월 과학저널 ‘네이처’에 Ti3SiO2의 성질을 게재해 오랜 믿음을 무너뜨렸다.
유 교수는 “실제 회로에서 열기전력의 효과는 아주 작지만 초정밀 회로에서는 열기전력이 큰 걸림돌로 작용했다”며 “Ti3SiO2로 회로를 만든다면 상온에서 열기전력이 0이기 때문에 회로의 정밀도를 한층 더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Ti3SiO2는 기존 세라믹 소재보다 전기전도율과 강도가 월등히 높아 ‘꿈의 신소재’로 평가받고 있다”고 강조했다. 세계 최고를 향한 그의 여정이 항상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그가 중학교를 다닐 무렵에는 비평준화제도였기 때문에 소위 명문고에 들어가려는 입시경쟁이 치열했다. 경북 안동중에서 공부를 아주 잘했던 그는 당시 서울의 명문고에 입학원서를 냈으나 자신의 예상과 달리 떨어졌다. 처음 경험하는 실패에 절망감을 느낀 그는 아예 고교 진학을 포기했다.
실패를 딛고 일어서라
그는 고향인 안동에서 3년이나 방황하며 보냈다. 걱정스런 마음조차 내색하지 않으려는 부모를 보며 그는 다시 공부를 시작했고 검정고시에 합격한 뒤 한 번의 실패 끝에 서울대 재료공학부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에는 전공공부뿐 아니라 고전을 읽는 재미에 푹 빠져 지냈다. 유 교수는 지금도 고전을 읽고 국악기를 배우는 데 열심이다. 연구실 한편에는 해금과 단소가 놓여 있었다.
그는 “동양고전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며 “고전을 읽으면 균형 잡힌 판단력을 갖출 수 있어 공학도에게 매우 유익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수능시험을 앞둔 수험생에게 “닭은 항상 한 번에 하나씩 모이를 먹는다”며 급한 마음에 서두르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는 또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며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더라도 좌절할 필요가 없다”고 조언했다. 변하지 않는 마음으로 꾸준히 나아가면 분명히 새로운 길이 열린다고 믿기 때문이다.
재료공학의 태동기에서부터 꾸준히 세라믹 연구과 함께 해온 그는 이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세라믹 연구자의 반열에 올랐다. 아직도 연구할 거리가 많다며 즐거워하는 그는 명실 공히 영원한 세라미스트이다.
P r o f i l e
1974년 서울대 재료공학과를 졸업하고 1976년 한국과학기술원 석사를 거쳐 1984년 미국 MIT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듬해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로 부임해 현재까지 재직 중이며, 2001년 ‘이달의 과학기술자상’과 2004년 ‘훔볼트 연구상’을 비롯해 많은 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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