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명가(名家) 자존심 지켰다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 김용환 교수 |
| 글 | 이현경 기자 ㆍuneasy75@dong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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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선급협회, 서울대에 100만 파운드 지원’ ‘서울대, 세계적 선박연구센터 건립’. 지난 2월 국내 언론들은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 김용환 교수가 이룬 쾌거를 대문짝만하게 보도했다. 서울대 이장무 총장과 로이드그룹의 무어하우스 회장이 조인식을 갖고 ‘서울대LRET기금선박유탄성연구센터’(이하 선박유탄성연구센터)가 정식으로 출범한다는 내용이었다. 김 교수가 센터장을 맡았다.
영국도 두말없이 인정한 1등
100만 파운드면 우리 돈으로 약 20억 원이다. 앞으로 5년 동안 지원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지원 규모가 아주 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연구비는 순수 로이드그룹의 기금으로만 운영된다. 서울대에서 내는 돈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서울대 공대 사상 외국 기관이 전액 지원해 연구센터를 설립하기는 처음이다. 그런데도 연구 결과는 모두 서울대 소유가 된다. 이 정도면 매우 파격적인 조건이다.
게다가 주로 유럽 지역에 연구기금을 지원하던 로이드그룹이 한중일 대학에 눈을 돌린 일도 이번이 처음이다. 지금까지 로이드그룹이 연구비를 전액 지원한 대학은 영국의 사우샘프턴대와 카디프대, 임피리얼대, 싱가포르의 싱가포르국립대, 네덜란드의 델프트공대 등 5곳뿐이다.
물론 김 교수가 이런 성과를 얻어내기까지 쉽지만은 않았다. 공개경쟁에서 1등을 뽑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정정당당하게 실력으로 승부하는 수밖에 없었다.
모든 조건은 불리했다. 공개경쟁에 참여한 다른 연구자들보다 김 교수는 상대적으로 젊었다. 당연히 국제적인 지명도나 노하우에서 선배 교수들에게 뒤쳐졌다. 미국 MIT 해양공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터라 ‘영국통’도 아니었다.
그래도 자신은 있었다. 로이드그룹이 공개경쟁을 진행한다는 소식을 접한 뒤 김 교수는 가장 먼저 국내 굴지의 조선 3사를 찾았다. 국내 조선업계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매일 매일을 선박과 씨름하는 그들이다. 그들이 풀지 못한 골칫거리가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로이드그룹도 눈독 들일만한 연구 주제가 아니겠는가.
김 교수의 예상은 적중했다. 조선 3사를 통틀어 전문가 23명을 만났다. 소속은 달랐지만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한 가지 문제를 지적했다. 바로 선박의 유탄성(hydroelasticity) 문제였다.
유탄성은 유체(파도)와 고체(선박)가 상호작용하며 생기는 특성을 말한다. 그동안 유체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선박을 딱딱한 강체라고 가정하고 유체를 해석했지만 실제로는 파도 때문에 선박이 조금씩 휜다. 특히 대형 선박일수록 휘는 정도는 크고 이는 곧 선박의 안전성 문제와 직결된다.
실제로 1999년 미국 오리건 주 쿠즈 만에 정박해있던 44만 t급 선박 뉴카리사호는 5, 6일 동안 높은 파도와 거센 바람을 맞은 탓에 배에 균열이 생겨 결국 가라앉았다. 해법은 하나밖에 없다. 김 교수는 “지금까지 선박의 구조 연구와 유체 연구는 독립적으로 진행됐다”며 “유탄성 연구를 통해 이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의 안목은 탁월했다. 깐깐한 로이드그룹의 눈에도 김 교수의 유탄성 연구 제안은 매력적이었다. 당시 공개경쟁 심사에 참여하지 않았던 로이드그룹의 무어하우스 회장은 훗날 김 교수의 유탄성 연구 발표를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나이가 너무 어린 사람이 1등을 차지했다고 하길래 의아했다”며 “얼마나 좋은 연구 제안서를 냈는지 궁금했는데 이제야 그 의문이 풀렸다”고 말했다.
현재 선박유탄성연구센터는 9개 연구 과제를 진행하고 있다. 가장 비중있는 연구는 ‘슬로싱’(sloshing). 슬로싱은 배 안에서 생기는 유탄성 문제 중 하나다. 가령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은 배가 파도에 좌우로 흔들릴 때마다 LNG가 출렁이며 탱크에 반복적인 힘(충격량)을 준다. 이를 슬로싱이라고 한다. 슬로싱이 LNG선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이밖에 선박이 바다에 입수하면서 생기는 충격량과 그 때 가장 효율적인 구조를 찾는 연구, 선박이 파도에 부딪치면서 휘는 현상이 선박의 수명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밝히는 연구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크루즈선 개발에도 참여해
김 교수가 ‘선장’으로 있는 해양유체역학연구실은 아직 4년 밖에 안됐다. 무어하우스 회장의 표현처럼 ‘어려서’일까. 김 교수뿐 아니라 연구실 분위기도 매우 역동적이다.
센서 등 조선 관련 부품을 개발하는 국내 벤처인 ‘시뮬레이션테크’는 최근 해양유체역학연구실 전용 실험동을 짓는 데 필요한 기부금 3억 원을 쾌척했다. 대학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기초 연구를 통해 좋은 인재를 길러내는 일이라는 김 교수의 의견에 뜻을 같이 했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대학의 가장 큰 목적은 교육”이라면서도 “교과서만 가르치는 ‘서당’이 아니라 기초 연구를 중시하는 연구중심 대학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요리에 비유하자면 맛있는 요리(선박)는 기업에서 만들고 이 요리에 필요한 밑재료(기초 연구)는 대학에서 준비하는 셈이다.
연구실은 최근 조선업계의 차세대 먹거리로 떠오른 크루즈선 연구에도 뛰어들었다. 지난 4월 대우조선해양과 공동으로 크루즈선 연구를 진행하기로 했다. 이 프로젝트에는 김 교수팀 외 조선해양공학과 교수단 5명도 함께 참여한다. 김 교수팀은 선박의 운동성능과 제어, 그리고 이와 관련된 승객의 편의성 예측 연구를 맡았다.
지난해 10월 STX가 세계 2위 크루즈선 제조업체인 노르웨이의 아커야즈를 인수하면서 국내 크루즈선 개발에는 청신호가 켜졌다. 하지만 김 교수는 여전히 조심스럽다.
‘떠다니는 칠성 호텔’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선박 내부에는 일류 호텔급 객실과 수영장, 골프연습장, 카지노, 테니스장, 영화관, 공연장 같은 레저시설이 완벽하게 갖춰져야 한다. 인테리어, 디자인, IT, 운동제어 같은 다양한 기술이 한데 어우러져야 한다. 그래서 크루즈선은 선박건조 기술의 최고봉으로 불린다.
결국 결론은 기초 연구다. 김 교수는 “노하우를 살 수 없다면 우리가 개발할 수밖에 없다”며 “도전할 만하다”고 말했다. 재능이 있는 자는 노력하는 자를 따르지 못하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따르지 못한다는 옛말이 있다. 24시간, 365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김 교수의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진정으로 연구를 즐기고 있기 때문이리라. 왠지 곧 ‘한국, 독자적으로 크루즈선 개발’이라는 희보가 전해질 것 같다.
5년 동안 20억 원 지원, 연구결과는 서울대 소유. 영국의 깐깐한 로이드그룹이 이렇게 파격적인 지원을 결정한 데는 김 교수의 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고수의 비법 전수
자신의 일, 자신의 연구에 자부심을 가져라. 자부심은 결국 밑바탕에 실력이 있어야 나오는 것. 결과와 책임도 뒤따른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성실하게 열심히 삶을 사는 방법을 깨달을 수 있다. 지름길은 없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자신의 분야에서 1등이 되겠다는 각오로 나아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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