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부렸다 모았다 ‘빛의 마법사’ - 서울대 전기컴퓨터공학부 이병호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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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윤신영ㆍashilla@donga.com |
“2003년 ‘네이처’에 실린 논문 한 편이 저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었습니다. 빛의 회절 현상을 다룬 논문이었는데, 신기한 내용이 실려 있었어요. 작은 홈이 뚫린 금속판과 레이저만 있으면 빛을 조절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지요. 보는 순간 ‘이거다’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서울대 전기컴퓨터공학부 이병호 교수(46)가 새로운 도전을 하기로 결심한 계기는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당시 이 교수는 3차원 시각 정보를 저장하는 기술인 ‘홀로그래피’ 분야에서 국제적인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었다. 정부로부터 ‘젊은 과학자상’을 받았고, 국제 광공학회와 미국 광학회에서 석좌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연구할 소재도 한참 남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연구 주제를 확 바꾼다는 것은 위험했다. 주변에서도 만류했다. 하지만 이 교수의 마음은 이미 기울어 있었다. 아직 세계적으로 미개척 상태인 새 연구 주제가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 “물론 하던 연구에 안주해도 괜찮았을 겁니다. 하지만 낯선 분야로 향하지 않고서는 또 한 번의 도약도 없었겠지요.” 이 교수가 새로 도전하기로 한 분야는 나노 광학 기술의 일종인 ‘액티브 플라즈모닉스’. 빛을 구부리고 모으고, 심지어 회전까지 시킬 수 있는 잠재력이 있었다. 빛의 마법사. 이 교수가 한 편의 논문에서 꿰뚫어 본 것은 정말 마법사의 능력이었을지도 모른다. 2007년, 이 교수는 연구실 이름을 ‘액티브 플라즈모닉스 응용시스템연구실’로 바꾸고 본격적으로 플라즈모닉스 연구에 뛰어들었다. 신비로운 마법의 빛, 플라즈몬 이 교수가 새로 시작한 ‘액티브 플라즈모닉스’는 얼른 이해하기 힘들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나노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사물에 비유해 설명하자면 렌즈가 가장 가깝다. 볼록렌즈나 오목렌즈가 빛의 진행 방향을 바꿔서 빛을 한 곳에 모으거나 흩뜨리듯, 플라즈모닉스 역시 빛을 모으고 진행방향을 바꾸기 때문이다. 다만 플라즈모닉스는 보통 빛 대신 ‘표면 플라즈몬’이라는 특수한 빛(파장)을 다루고, 사용하는 재료도 유리가 아니라 수백nm(1nm=10억분의 1m) 크기의 금속이라는 점이 다르다. “재료뿐 아니라 일어나는 현상도 무척 다릅니다. 나노 영역이기 때문에 기존 광학에서 볼 수 없던 흥미로운 현상이 많이 일어나거든요.” 보통 물질의 원자 안에는 핵과 전자가 단단히 묶여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금속 안에 있는 전자는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성질이 있다. 바로 자유전자다. 금속이 전기가 잘 통하는 이유는 자유전자가 금속 안을 움직이며 전류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유전자는 전기뿐 아니라 파장이 맞는 빛도 잘 흐르게 한다. 빛 역시 전자기적인 특성을 지닌 입자이기 때문이다. 금속 표면에 닿은 빛 입자 중 가시광선이나 적외선은 전자와 함께 진동하며 표면을 흘러 다른 곳으로 향한다. 이렇게 흐르는 빛이 ‘표면 플라즈몬’이다. 액티브 플라즈모닉스는 이런 표면 플라즈몬을 원하는 각도와 형태로 자유롭게 조절하는 기술이다. “플라즈모닉스 기술을 이용하면 기존의 광학 지식으로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를 많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돋보기로 햇빛을 모으면 한 점에 빛이 모이지요? 이런 점을 ‘핫스폿’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자연 상태의 빛으로는 그 빛이 가진 파장 길이의 절반 이하로는 핫스폿을 만들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파장이 600nm인 가시광선으로는 핫스폿의 지름을 300nm보다 작게 만들 수 없지요.” 핫스폿을 작게 만들면 광신호를 더 미세하게 기록하고 재생할 수 있어 저장매체의 성능을 높일 수 있다. 그래서 CD나 DVD보다 용량이 큰 저장 매체를 만들기에 유리하다. 최근에는 빛을 이용해 정보를 기록하는 광 반도체 집적회로 연구도 활발한데, 플라즈모닉스 기술을 응용하면 처리용량이 더 큰 회로를 만들 수 있다. “최근 연구하고 있는 ‘플라즈모닉 소용돌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이용하면 빛을 약 1000배 강하게 만드는 것도 가능합니다. 핫스폿의 크기가 작고 빛이 강하면 분해능이 높아집니다. 분자 크기의 물질을 구분해낼 수 있는 정밀 센서를 만드는 데에 응용할 수 있지요.” 최근 이 교수는 플라즈모닉 소용돌이 안에 물질을 집어 넣는 ‘광학 집게’ 현상을 연구하고 있다. 빛의 소용돌이가 강한 에너지를 형성하면서 그 안에 물질을 담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일종의 빛으로 만든 그릇인 셈이다. 이 그릇을 다른 곳으로 옮길 수도 있다. 아직은 작은 나노 입자를 겨우 지탱하는 정도지만, 연구가 진행되면 DNA 조각과 같은 생체 분자를 몸 속 깊은 곳으로 나르는 데 쓸 수 있을 것이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모험심 이 교수가 기존의 진로를 포기하고 낯선 길을 택한 사례는 과거에도 있었다. 바로 1989년 유학길에 오를 때다. 당시 이 교수는 서울대 공대를 수석졸업하고 가장 인기가 높은 공학 분야 중 하나인 회로설계로 석사학위까지 받은 상태였다. 한 마디로 미래가 보장된 상태였다. 하지만 이 교수는 익숙한 회로설계 대신 낯선 광학 분야를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자신이 더욱 원하는 연구에 조금이라도 가깝게 다가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원래 고등학교 때부터 줄곧 물리학을 공부하고 싶었어요. 비록 전자기학과 회로설계를 공부했지만, 좀더 물리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학문을 연구하고 싶었습니다.” 당시 이 교수가 유학을 간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광학 및 양자전자연구실에 회로설계를 전공한 연구원은 이 교수뿐이었다. 다른 연구원들과는 출발이 달라 불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교수는 완전히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광학 연구에 매달렸고, 결국 홀로그래피와 광통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렇게 이 교수로 하여금 과감히 진로를 바꾸게 만든 동력은 무엇일까? 이 교수는 재미와 보람을 꼽는다. “저는 진로에 대해 문의하는 학생들에게 자신이 가장 큰 재미를 느끼는 분야를 찾아 거기에 매진하라고 조언해 줍니다. 전망이 좋을지, 경쟁이 치열할지 물으며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자신이 진정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이 교수는 청소년들에게 즐겁게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과학과 공학도 있다고 강조했다. “비선형광학이라는 학문 분야를 개척해 노벨상을 받은 블렘베르겐 박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은 비선형적이어서 예측이 어렵다. 하지만 똑똑한 젊은이들이 이 분야의 연구에 계속 뛰어드는 한, 예측하지 못한 뛰어난 연구 결과가 계속 나올 것이라는 예측은 할 수 있다’고요. 과학과 공학은 여러분과 같은 똑똑한 인재를 기다리고 있답니다.” 고수의 비법전수 가장 재미를 느끼는 분야가 있다면 그곳에 매진해 보라. 진정 하고 싶은 일을 즐기면서 하는 삶이 보람 있는 삶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