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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빠른 반도체를 디자인하다 - 정덕균 서울대 전기공학부 교수
분야 정보기술.컴퓨터통신/반도체
산업기술/전기
날짜 2011-04-05
가장 빠른 반도체를 디자인하다
정덕균 서울대 전기공학부 교수
| 글 | 김상연ㆍdream@donga.com |

“우리 실험실의 목표요? 반도체 산업에서 구글 같은 회사를 만드는 거죠. 정확히 말하면 구글 같은 회사를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을 키워내고 싶어요. 스티브 잡스는 대학교를 중퇴하고 바로 애플을 창업했지만 구글 창업자인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는 스탠퍼드 대학원까지 마치고 회사를 만들었어요. 우리 실험실에서 그런 전문지식과 창의성을 길러주고 싶어요.”

정덕균 서울대 전기공학부 교수(51)는 자신이 이끌고 있는 ‘집적시스템 설계 연구실’에 대해 “세계에서 가장 빠른 반도체를 설계하고 있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한마디로 반도체 위에 수많은 트랜지스터를 배열해 초고속 회로를 만드는 ‘반도체 디자인’을 한다. 정 교수는 1990년대 중반 PC에서 영상 정보를 고속으로 주고받는 반도체인 ‘고속 비디오 신호 전송회로(DVI)’를 개발했다. 이 기술은 미국의 벤처기업을 통해 1998년 국제 표준이 됐다. 이 업적으로 정 교수는 지난해 제19회 호암상을 받았다.

마감에 쫓기다 대박을 터뜨리다

“그 기술을 처음 개발한 게 1995년이었어요. 당시만 해도 영상 정보를 고속으로 보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물론 비싼 반도체를 쓰면 가능했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흔히 쓰는 싼 반도체(CMOS 반도체)로 그 일을 해내는 게 과학자들의 숙제였죠.”

당시 정 교수는 며칠 뒤 미국에 가서 해결 방안을 발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발표 날짜는 이틀밖에 남지 않았는데 도저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바둑으로 치면 초읽기에 몰린 셈이었는데 불현듯 떠오른 방법이 그 기술이었다.

정 교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절에 들어가 매달리는 사람도 있지만, 난 반대”라며 “막판까지 미뤄놓다가 마지막에 멋진 아이디어를 내놓은 셈”이라고 말했다.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을 때도 그랬다. 그는 프로젝트 발표 3일을 남겨놓고 떠오른 아이디어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물론 평소에 쏟았던 고민과 노력이 아이디어로 떠올랐을 것이다.

“DVI 기술을 자세히 설명하면 이래요. 디지털 정보라는 게 결국 0과 1의 배열이잖아요. 신호를 주고받으려면 0이나 1을 한 덩어리로 보고 하나하나 잘 잘라서 보내야 해요. 잘못 자르면 에러가 생기죠. 그래서 같은 0 덩어리를 이렇게도 자르고 저렇게도 잘라서 여러 번 보내면 받는 사람은 확실하게 0이라는 걸 알게 되죠. 이 작업을 시간 격차를 약간씩 두고 병렬로 보내면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정보를 보낼 수 있어요. 이 기술을 ‘과표준화’라고 하죠.”

고화질(HD)TV의 왼쪽 아래를 보면 외부에서 가져온 기술을 나타내는 몇 가지 로고가 있다. 그 중 하나가 HDMI다. 정 교수가 개발한 DVI 기술에 음향 기능을 추가한 것이 이 기술이다. 이처럼 정 교수의 기술을 적용한 컴퓨터나 고화질(HD)TV, 셋톱박스 등은 현재 세계적으로 20억대를 넘어선 것으로 추산된다.
 
   
 
 

정 교수의 연구실에서는 지금도 후속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당시만 해도 그가 만든 반도체의 통신 속도는 1초에 5억 비트의 정보를 보내는 수준이었다. 지금은 1초에 400억 비트를 보낸다. 값싼 반도체를 이용해 데이터를 전송하는 기술로는 세계 최고 속도다. 정 교수는 “시장을 보고 만든 건 아니라서 당장 제품으로 만들 수는 없겠지만 언젠가는 도움이 될지 모른다”며 “실험실에서는 다양한 반도체 설계뿐만 아니라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주파수 합성 기술도 연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정 교수는 어렸을 때부터 전자기기를 좋아했다고 털어놨다. 초등학생일 때도 손수 6석 라디오나 무전기를 만들며 전자공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

중학교 시절에는 토요일만 되면 세운상가를 돌아다니며 트랜지스터, 저항, 콘덴서 등을 사다가 전자회로를 조립하는 취미에 빠져들었다. 그는 “요즘으로 치면 인터넷이나 게임 중독과 비슷했을 것”이라며 웃었다. 이러한 호기심에 빠져 대학에 들어와 전자공학을 전공했다. 정 교수는 “호기심과 취미가 창의성과 열정으로 바뀐 셈”이라고 말했다.

정 교수에게 공학자에게 필요한 자세를 물어봤더니 “호텔에 불이 난 상황을 생각해 보자”고 말을 던졌다. “수학자는 불을 보고 ‘끌 수 있는 불이다’라고 판단하고 실제로는 불을 끄지 않고 계속 잠을 잡니다. 물리학자는 얼마나 물을 퍼부어야 끌 수 있는지 열심히 계산합니다. 세 양동이 반이라는 계산 결과가 나와 그만큼 물을 퍼부었지만 불은 꺼지지 않았어요. 계산하는 동안 불길이 더 번졌기 때문이죠.”

정 교수는 “그럼 공학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고 물었다. “공학자는 여러 상황에 대한 실험 결과를 미리 머리 속에 담아 두고 지금 불을 끄려면 4개의 양동이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손을 써서 불을 꺼야죠. 소수점 이하를 다루는 정밀성보다는 적절한 범위 안에서 재빨리 행동하는 실용성이 공학자에게 더 필요한 거죠.”

실리콘밸리에 도전하다

전자산업, 특히 반도체 산업이 각광받으면서 반도체 디자이너는 공대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분야다. 집적시스템설계 연구실에는 현재 20명 정도의 석박사 과정 학생이 소속돼 있다. 공대에 들어온 많은 학생들의 꿈이 자신만의 기술을 갖고 창업을 하는 것이다. 정 교수도 인터뷰 내내 구글이나 애플을 언급하며 학생들의 창업을 독려했다. 물론 정 교수는 “졸업하고 나서”라며 웃었다.

실제로 연구실 출신인 이경호 박사는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GCT라는 반도체 회사를 설립했다. 무선통신용 반도체를 만드는 회사인데 지난해 매출액이 500억 원에 달하고 엔지니어도 200여 명에 이르는 벤처기업이다. 정 교수는 “연구실 졸업생의 절반은 삼성전자에 가고, 절반은 벤처를 포함한 다른 기업에 취업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어떤 학생들이 반도체 디자이너에 맞을까. 반도체 설계는 물리학과 수학이라는 기본 바탕 위에 전기전자공학의 다양한 분야를 종합적으로 사용한다. 정 교수는 “새로운 자연 현상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발명과 창의성의 학문이므로 호기심과 열정,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모험심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공학적인 디자인 감각이 넘치고, 스티브 잡스 같이 세상을 바꾸고 싶은 사람을 환영한다고 한다. 정 교수는 “공대에 들어오면 전공 과목도 열심히 공부해야 하지만 특허나 경영 수업도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요즘 우수한 자연계 학생들이 공대와 의대를 놓고 많이 망설인다는데 창의성이 높은 학생이라면 의대보다 공대에서 더 크게 활동할 수 있어요. 공대는 자기 능력에 따라 결과가 많이 달라지거든요. 안정적인 직업이 공부의 목적은 아니잖아요? 능력 있는 학생이라면 공대를 나와 더 글로벌하게 활동할 수 있습니다.”


고수의 비법전수
공학에는 내 손으로 익힌 지식과 경험이 가장 중요하다. 응용 제품을 내놓으려면 다른 분야도 피상적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알아야 한다. 공학은 실제 문제를 현실에서 해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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