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이 이끌어온 반도체 과학 - 서울대 전기공학부 박영준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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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이종림 기자ㆍljr@donga.com |
“도체 안에는 무수히 많은 전자가 있고, 그들은 태생적으로 플러스극 방향으로 움직이며 전류를 발생시킵니다. 마치 물이 흐르듯이 말이죠. 하지만 반도체는 말 그대로 전기가 반쯤 통하는 물질입니다. 신이 그렇게 만든 것일 수도 있고, 자연이 그렇게 만든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전기가 흐를 수 있는 걸까요? 상상에서부터 과학은 출발합니다.” 서울대 전기공학부 박영준 교수는 1980년대 이후 국내 반도체 신화를 이끌며 2008년 한국과학창의재단이 선정한‘닮고 싶고 되고 싶은 과학기술인’으로 뽑힌 바 있는 반도체의 거장이다. 반도체 연구의 한 길을 걸어온 지 벌써 40년이 돼가지만, 반도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처음 접했을 때의 설렘이 얼굴에 되살아난다. 그리고 지긋이 눈을 감고, 인류가 반도체를 연구해왔던 60여 년의 여정을 추억처럼 꺼내놓는다. “반도체란 얼마나 신기한 것입니까? 반도체에는 전자가 움직임으로써 전류가 흐르는데 전자가 빠져나가 비어 있는 곳이 정공입니다. 전자와 정공의 개념을 알기까지 최고의 과학자들은 눈으로 볼 수 없는 원자의 세계를 상상만으로 접근했어요. 전자가 많은 n형 반도체와 정공이 많은 p형 반도체를 적절히 조합해 우리 생활에 이용하게 됐죠.” 짧은 기간 동안 상상력이 키워온 반도체의 발전사를 떠올리면, 1960년대 미국 벨연구소에서 한국인 최초로 반도체 기술을 이끌었던 강대원 박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강 박사는 모스펫(MOSFET: Metal-Oxide-Semicon ductor Field-Effect Transistor, 금속 산화막 반도체 전계효과 트랜지스터)을 세계 최초로 발명한 인물이다. “반도체에 대한 연구가 이제 막 시작되던 시기였어요. 당시 벨연구소에 있던 강대원 박사가 p형 반도체에 새로운 방식으로 전압을 가해주는 기술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모스펫입니다. 모스펫 기술로 인해 전력 소비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죠. 컴퓨터 CPU와 메모리 장치인 D램, S램, 휴대전화용 통신칩을 만드는 기초가 됐어요. 반도체를 연구하는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낄 만한 일입니다.” 반도체에 푹 빠져 지내던 그때 박 교수가 처음 학부에서 전기공학을 배웠던 1970년대 초반만 해도 국내에 반도체라는 말조차 생소했다. 서울대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하며 손톱만 한 반도체의 신비에 푹 빠져서 어떻게 전기신호가 증폭되는지, 어떻게 수억 개의 회로가 작동하는지 파헤치기 위해 밤낮없이 연구했다. 그리고 해군장교 복무 중에는 컴퓨터를 이용한 편미분방정식으로 반도체 동작을 이해할 수 있다는 논문을 읽고 1만 줄짜리 포트란 언어 프로그램을 짜기도 했다. 그 결과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박사과정에 장학금을 받고 들어갈 수 있었다. “반도체라는 그 조그마한 칩 안에 어떻게 트랜지스터를 수천~수억 개씩 넣어 회로를 만든다는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직접 반도체를 만들어보겠다고 뛰어들어 처음 반도체 샘플을 만들어본 기쁨은 평생 잊을 수 없어요.” 박 교수는 MIT에서 반도체 소자 시뮬레이터 기술을 연구한 뒤, 하이닉스 연구소장을 거쳐 서울대 교수직으로 돌아왔다. 이론적 연구를 실제 반도체 개발에 적용하는 데 애쓴 과학자로 평가받으며 산업 발전에도 큰 획을 그었다. 그 사이에 반도체 기술도 무한히 발전해, 이제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TV, 휴대전화, MP3플레이어, 노트북을 비롯한 모든 전자제품에는 반도체가 들어 있다. 반도체의 강점은 도체와 부도체를 넘나드는 유연성에 있다. 반도체 안의 전자가 활발히 움직이는 조건을 잘 이용하면 다양한 분야에 편리함을 줄 수 있다. 예를 들어 디지털카메라는 전자가 빛에 반응하는 특성을 이용해 만들어진 것이며, 온도가 높으면 전자가 더 활발히 움직이는 성질을 이용하면 온도 센서를 만들 수 있다. 암 추적하는 차세대 바이오칩 개발 중 박 교수가 이끄는 물리전자연구실에서는 반도체를 많은 분야에 응용하기 위해, 그 동작 원리를 이해하고 반도체 소자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물리적으로 모델링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와 함께 시스템 성능을 저하시키는 반도체 잡음 특성을 예측하고, 반도체 소자들이 균일하게 동작하도록 신뢰성을 높이려는 연구를 한다. “작은 칩 안에 트랜지스터를 수십억 개 만들어 넣으려면 전자와 정공의 움직임을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미분방정식으로 표현되는 그 법칙을 물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물리전자’입니다. 최근에는 인체 속 병균을 발견하고, DNA나 암을 추적할 수 있는 차세대 바이오 칩을 개발하는 데 주력하고 있어요.” 물리전자연구실은 최근 탄소 나노 튜브와 같은 나노 소자를 바이오 센서에 응용하는 차세대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박 교수는 나노 크기의 반도체는 물론 나노과학의 응용을 심층적으로 연구하는 서울대 나노응용시스템연구센터에서 소장을 맡고 있다. 이곳에서는 나노전기공학, 나노화학재료공학, 나노생명과학의 첨단 연구를 진행 중이다. “이제 회로선폭이 30nm(나노미터, 1nm= 10-9m)인 반도체가 등장하며‘30나노시대’가 왔습니다. 반도체는 회로 선폭이 좁아질수록 처리 속도가 더 빠르죠. 나노과학 연구가 활성화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더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는 분야입니다. 반도체뿐 아니라 다양한 공학에 응용이 가능하죠.” “이제는 융합의 시대” “독창성, 창의성이라는 것은 곧‘융합’의 길로 연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최고의 자리에 올라 더이상 배울 게 없을 때, 자연스레 다른 분야로 눈을 돌리게 되죠. X선이 없었다면 분자생물학은 발전할 수 없었고, 신호체계를 수학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면 오늘날의 전기공학도 존재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박 교수는 우리나라가 휴대전화, 디스플레이, 반도체, 조선과 같이 여러 분야에서 세계 일류로 인정받고 있는 시점에서 이제 다음 단계를 준비할 때라 말한다. 그 해답이 바로 과학과 기술, 과학과 철학, 과학과 의학의‘융합’이다. 그는 연구실 제자들을 비롯해 앞으로 융합의 시대를 살아갈 젊은이들에게‘transcent’의 개념을 말한다. 찰스 다윈의‘종의 기원’에서 나온 descent, 제이콥 브로노프스키의‘인간 등정의 발자취’에서 비롯된 ascent가 있었다면, 이제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 “매일 매일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경이롭다고 느끼는 데서부터 과학은 출발합니다.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휴대전화를 쓰고 있지만, 10년 전 휴대전화를 갖고 있었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겠어요? 그렇게 시간을 초월하는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노벨상 수상도 알고 보면 별것 아닌 발견인 경우가 많습니다. 사소한 사고의 전환이 가져온 놀라운 결과죠.” 고수의 비법전수 자신의 분야에서 깊이 있는 학문 탐구를 했다면, 그 다음 단계로 다른 분야에서 아이디어를 얻도록 한다. 그것이 융합공학의 출발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