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이공계 CEO의 전성시대-기술경영
| 글 | 박용태 서울대 기술경영대학원 주임교수ㆍparkyt@cybernet.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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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과 자본보다 기술과 지식이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되면서 기술적 전문성과 과학적 분석 능력을 갖춘 이공계 경영인의 수요가 늘고 있다. |
세계 경제는 기술중심주의로 점점 바뀌어 가고 있다. 공학적인 전문성과 함께 경영학적인 치밀한 전략이 어느 때보다도 요구된다. 외부환경과 정부정책, 산업구조, 경영기능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필요한 것은 물론이다. 바야흐로 테크노경영자의 시대가 온 것이다.
다가올 미래를 살아갈 한 사람의 사회인이자 한 분야의 전문직업인으로 공학도가 가져야 할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과연 기업에서 전문적인 기술자나 창의적인 연구원의 위치를 넘어 조직 전체를 운영하고 관리하는 최고경영자(CEO)가 될 수 있을까? 나아가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중심적인 지도자의 위치에 오를 수 있을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공대 출신자의 진로는 뻔해 보인다. 어려서부터 무엇인가 만들고 분석하는 것이 취미인 본인의 적성에 따라, 혹은 취직하기 좋고 직장생활을 오래 하기엔 기술자가 최고라는 부모님의 권유에 따라 고등학교에서 이과를 선택하고, 공과대학으로 진학한다. 제조업체에 입사한 뒤로는 생산현장에서 성실히 근무하여 마침내 공장의 책임자로 승진한다. 생산직이 아니라 연구직으로 진출한 경우에도 큰 차이는 없다. 조용한 연구실에서 열심히 연구한 경우에도 연구원, 선임연구원, 책임연구원을 거치며 연구조직의 책임자로 성장한다.
이런 상황에서 이공계 인력이 궁극적으로 CEO가 될 수 있는 경로는 쉽게 보이지 않으며, 공학도 자신도 굳이 새로운 경로를 개척하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최근에는 기술자산과 지식자본의 중요성이 알려지고 또 정보통신 기술의 활용도가 높아지면서, 이공계 출신자가 CEO로 올라가기 위한 중간 관문의 성격을 갖는 새로운 역할들이 각광을 받고 있다. 최고기술책임자인 CTO(Chief Technology Officer)나 최고정보책임자인 CIO(Chief Information Officer), 최고혁신책임 자인 CInO(Chief Innovation Officer)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CEO라는 정점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여전히 높고 험한 관문들이 많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제 세상은 바뀌고 있다. 노동이나 자본보다 기술과 지식이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되고 시장경쟁의 무기가 되는 시대가 다가오면서, 기술적 전문성은 물론 합리적 사고방식과 과학적 분석능력을 갖춘 이공계 인력이 사회 지도자로, 조직의 최고경영자로 진출할 수 있는 문이 점점 더 많이 열리고 있다. 특히 국제경쟁력을 제대로 갖춘 기업과 조직일수록 이공계 출신의 CEO 비중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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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11월 3일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열린 `제1회 삼성 애널리스트 데이`에서 2010년에 115조원의 매출을 올려 세계 전자업계 톱3에 진입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고 있다. |
학문 체계의 진화의 결정체, 기술경영
공대 출신이 CEO가 되는 시대가 열린다는 사실은 학문체계도 그만큼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구의 근대과학은 이른바 데카르트적 이원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자연과 인간’ ‘물질과 정신’ ‘자연계와 사회계’는 엄격히 구분되며 지식 근본 자체가 뿌리부터 다르다는 것이다. 동양철학에도 유사한 원리와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학과 자연과학을 포함한 과학기술은 ‘난해한 과학’(hard science), 사회과학은 ‘부드러운 과학’(soft science)으로 크게 나눠 대비하는 사고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오랜 역사를 찬찬히 살펴보면, 과학기술과 사회과학은 ‘통합→분리→확대→ 연계’ 과정을 밟으면서 진화해왔음을 알 수 있다. 16세기말 종교에서 떨어져 나와 시작된 초기 근대과학은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18세기를 거쳐 19세기 초에 이르러 선험적·관념적 사고에 기초한 학문은 인문과학 즉 ‘arts’ 또는 ‘letters’로, 실험적·경험적 근거를 강조하는 학문은 자연과학 즉 ‘science’로 나뉘게 된다. 특히 19세기는 사회적, 정치적 패러다임의 근본 변화와 더불어 학문의 분화가 활발히 일어난 시기였다. 자연과학 자체도 비경험적 속성을 지니는 수학과 경험적인 속성을 지니는 물리학, 화학, 생물학으로 나뉘었고 인문과학도 철학, 문학, 역사학 등으로 분리됐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걸쳐, 산업자본주의가 형성되면서 자연과학을 산업화하기 위한 다양한 공학이 자리 잡게 되고, 인문과학의 사회적 연계를 지향하는 사회과학, 즉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이 생겨남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종합대학의 기본틀이 정착됐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사회시스템이 다양성과 복잡해지고 과학기술이 예측하기 어려운 속도와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학문 간의 연계와 통합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커져갔다. 이에 따라 세분된 학과들이 통합적인 학부로 재편되거나 관련 학과들이 공동 과정을 개설하는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최근 일어나고 있는 이런 움직임은 한걸음 더 나아가 보다 근본적인 구조 조정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회과학과 과학기술간의 결합을 통해 아예 새로운 학문 분야를 만들어 낸다거나, 독자적인 학과를 신설하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공학으로 하는 기업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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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벤처의 요람이었던 서울 강남 테헤란밸리. 벤처거품이 빠진 뒤에도 참신한 아이디어와 기술력을 자랑하는 벤처기업들의 선망의 대상이다. |
과학기술과 사회과학 간의 경계선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접점은, 공학과 경영학이 만나는 영역, 즉 기술경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기술경영은 영어로 ‘Management of Technology’로 ‘공학과 경영학의 원리를 결합해 기업의 전략적이고 실무적인 목표를 수립하고 달성하는 능력을 개발해 응용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한다. 아직도 공과대학에서 경영 관련 과목을 가르치고 기술경영 학과나 대학원을 운영하는 것이 낯설기는 하지만 이미 많은 공대생들의 큰 관심을 끌고 있을 만큼 성장하고 있다.
오늘날 기업경영이 공학 이론과 방법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한마디로 기술이 세상을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경영학이 기술혁신으로 일어난 산업혁명의 산물이었던 것처럼, 오늘날의 새로운 경영학도 정보혁명과 지식혁신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공학도를 위한 경영학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기업경영에서 공학 이론과 방법이 요구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크게 다음의 네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공학적 토대는 새로운 형태의 기업을 경영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신기술을 토대로 창업한 신생 벤처 기업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표준화된 제품을 되풀이해서 만드는 제조기업이 아니라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서비스를 판매하는 서비스 기업도 여기에 속한다. 온라인에서 거래를 하는 전자상거래 기업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 같은 기업들은 예외 없이 기술적 전문성을 토대로 하기 때문에 공학과의 결합이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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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잊은 벤처인. 인터넷을 포함한 정보기술의 발전은 새로운 방식의 경영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다. |
둘째, 새로운 경영 기능을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경영학이 다루는 중요한 경영 기능으로 재무, 회계, 마케팅, 인사, 생산에 한정됐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연구개발과 엔지니어링’ ‘인트라넷 거래와 인터넷 거래’ ‘기술 거래’ 등 경영상 새로운 기능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런 새로운 기능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라도 공학적 전문성이 뒷받침돼야 한다.
셋째, 새로운 경영 자산을 어떻게 관리하느냐 문제도 공학적 지식을 요구한다. 회계학적으로 자산이라 인정받기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 요건을 만족해야 한다. 먼저 경제적 가치가 있어야 하고 다음으로는 그 가치를 화폐 금액으로 측정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회계학에서 다뤄온 경영 자산은 주로 이런 요건을 만족시키는 물적 자원들이고 기술, 정보, 지식, 특허 등 만질 수 없고 가치를 측정하기도 어려운 자산은 경영학의 관심을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지적자산의 가치는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커졌을 뿐 아니라, 그 크기를 화폐가치로 측정하는 것도 가능해지고 있어 명실상부한 자산으로 취급되고 있다. 이런 경영자산을 만들어내는 것도 공학도이고 따라서 잘 관리할 수 있는 사람도 공학도다.
넷째, 새롭게 성장하는 시장과 거래 방식을 관리하는데도 공학적인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 최근 하이테크 제품과 서비스가 등장하고 거래 방식이 온라인으로 바뀌면서 시장은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변화를 겪고 있다. 사는 사람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파는 사람이 선택하는 이른바 ‘역시장’이 나타나고 전자상거래에선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 출현하고 있다. 온라인 기술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시장에 전략적으로 대응하기란 불가능하다.
무궁무진한 응용 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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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개발된 하이테크 제품의 마케팅은 전통적인 마케팅과 다른 현대적인 기법을 요구한다. 해외 바이어와 화상회의를 하고 있는 한 국내 기업 마케팅 담당자들. |
기술경영이 포괄하는 영역은 기업의 경영관리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새롭고 재미있는 응용분야가 다양하게 생겨나고 있다. 몇 가지 예를 생각해 보자. 요즘 금융공학이라는 분야가 등장하고 있다. 우리는 금융하면 주로 은행이나 증권회사에서나 이뤄지는 일반 금융거래를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최근 들어 그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위험하지만 수익성이 엄청나게 높은 금융상품과 서비스가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다. 이런 상품과 서비스를 분석하고 개발하려면 고도의 과학적 이론과 컴퓨터 기술이 요구된다. 따라서 요즘은 금융시장에서는 경영대학 출신보다 공대 출신들을 더 선호한다고 한다.
차세대 신제품 개발은 어떤가? 이제는 단순히 소비자의 요구사항을 반영하는 수준의 신제품으로는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다. 방대한 양의 특허를 분석하거나 기술과 제품 간의 구조를 연결시키는 과학적 방법론이 각광받고 있다. 또한 새로 개발된 하이테크 제품의 마케팅은 전통적인 마케팅과 다른 현대적인 마케팅 기법의 개발을 요구한다. 고객정보를 수집해 개인 취향과 수요에 맞는 맞춤형 마케팅 정보를 제공하거나 제품 수명주기에 따라 마케팅 초점을 바꾸는 일은 수학, 컴퓨터, 통계 등 과학적 지식과 이론을 필요로 한다. 더구나 요즘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는 IT, BT, NT 같은 신기술 분야의 제품개발과 마케팅은 공학적인 전문 지식과 경영적 전략 감각이 모두 중요하다.
휴먼-컴퓨터 인터페이스 설계와 디자인 분야도 주목할 만한 주제다. 앞으로 모든 제품은 극소형 칩을 중심으로 언제, 어디서나 사용할 수 있는 유비퀴터스 개념으로 진화할 것이다. 따라서 사람과 컴퓨터가 어떤 방식과 형태로 상호작용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지를 분석하고 그 정보를 제품의 설계에 반영하는 일도 매우 유망한 영역이 된다.
공과대학에 가면 전통적인 공학만을 공부하고 생산 현장이나 연구실로 진출한다는 생각은 그야말로 낡은 고정관념이다. 공학적 이론을 실물경제에 적용할 수 있는 범위와 주제는 끝없이 늘어나고 있다. CEO로 올라갈 수 있는 기회가 어느 때보다도 폭넓게 열리고 있는 시대다. 기업에 취업하기 보다는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독점적 기술로 회사를 창업해 처음부터 CEO가 되는 기회도 늘어나고 있다. 어느 길이든 공대에서 기술과 경영을 함께 공부하고 연구하는 준비단계가 필요하다. 그러한 준비를 잘 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교과목을 운영하고 다양한 실습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기술경영학의 궁극적인 학문적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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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경영기법은 수학, 컴퓨터, 통계 등 다양한 과학적 지식을 요구한다. 코스닥 시세를 분석하고 있는 애널리스트. |
새로운 천년으로 들어선 길목에서 세계는 경제사회구조가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 선진국들은 기술우위를 계속적으로 누리기 위해 전략적인 제휴를 전개하고 있고 정보기술은 세계를 점점 가깝게 묶고 있다. 우리의 경제와 산업구조 역시 마찬가지여서 구조조정이라는 과도기를 통과하며 혼란과 위기를 겪고 있다. 전통적인 경영방식이 무너지면서 지식과 기술을 결합해 폭발적인 시너지를 발휘하는 새로운 경영 패러다임이 요구되는 때다.
기술경영은 공학과 경영학의 통합적 관점에서 시대의 요구에 접근하고 있다.
박용태 교수는
박용태 교수는 서울대 산업공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위스콘신매디슨대에서 생산관리로 경영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삼성물산과 과학기술정책관리연구소를 거쳐 현재는 서울대 기술경영협동과정 주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기술경영경제학회 상임이사, 대한산업공학회, 한국경영과학회 이사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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