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분자 나노소재공학 - 자연모사기술의 핵심
글 : 차국헌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교수 ( khchar@plaza.snu.ac.kr )
영화 ‘스파이더맨’의 주인공 피터는 유전자가 변형된 거미에게 물린 뒤 슈퍼거미와 같은 능력을 지니게 된다. 손바닥에 이상한 털이 나면서 벽면을 타고 올라갈 수 있을 뿐 아니라 손목에서는 거미줄이 나온다. 이와 같은 내용은 더 이상 영화에서만 나올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거미나 도마뱀 같이 벽면이나 천장에 붙어 자유롭게 이동하는 생물체는 지난 수십년간 과학자들의 집중적인 연구대상이었으며 최근 그 원인이 바로 발바닥 표면에 존재하는 수백nm(나노미터, 1nm=10-9m) 크기의 가는 섬모들과 벽면 사이에 작용하는 반데르발스힘 때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오랜 세월 동안 진화를 거듭하며 최적화된 생체물질은 기계공학이나 화학공학을 전공하는 과학자들에게 수많은 영감과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2006년 초 미국 스탠퍼드대에서는 도마뱀의 발바닥을 모사한 고분자 패드를 제작해 유리벽을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는 ‘스티키봇’(stiky-bot)이라는 로봇을 만들었다. 이런 기술은 사람이 직접 가기 위험한 곳에서 활동하는 로봇에 활용할 수 있다.
또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서갑양 교수는 게코(Gecko)도마뱀 발바닥과 비슷한 구조의 접착테이프를 만들었다. 서 교수의 기술은 고분자가 길게 늘어나는 신장성(elongation)을 이용했기 때문에 손쉽게 접착테이프를 제작할 수 있다. 이 접착테이프는 기존의 접착제와 달리 기화하는 접착성 화학물질이 없어 반도체 생산공장 같은 청정 환경에서도 사용이 가능하다.
물에 젖지 않는 옷과 김 안 서리는 안경
자연으로부터 특수한 기능을 모사해 공학적으로 활용하는 기술을 자연모사기술(biomime- tics)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기술의 핵심소재로 고분자 나노소재를 꼽을 수 있다. 고분자 나노소재는 수nm 단위로 물질을 합성해 만들기 때문에 모사할 대상만 있다면 손쉽게 이를 재현할 수 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자연 전체를 nm 단위로 관찰해 각 개체 표면의 형상과 그 기능을 분석한다. 식물도 예외는 아니다. 연못에서 볼 수 있는 연꽃잎은 표면에 수nm 크기의 무수한 돌기가 있다. 이로 인해 연꽃잎은 물에 젖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연꽃잎 밑으로 굴러 떨어지는 물방울이 연꽃 표면의 먼지를 제거하는 자정효과도 있다. 과학자는 연꽃잎의 표면을 모사한 고분자 박막을 만들어 물에 젖지 않는 옷이나 비가 내리면 저절로 때가 벗겨지는 페인트에 응용했다.
이와 반대로 물을 흡수하는 표면도 있다. 사막에 사는 나미브 딱정벌레는 껍질을 이용해 물을 섭취한다. 새벽이 되면 껍질에 이슬이 맺히는데, 나미브 딱정벌레의 등에는 두 종류의 껍질이 있어 한 껍질은 물을 잘 흡수하고 다른 하나는 물에 젖지 않는다.
나미브 딱정벌레는 물을 흡수하는 껍질로 새벽이슬을 흡수해 물방울을 만든 뒤 물에 젖지 않는 다른 표면을 통해 입으로 옮겨 살아가는 데 필요한 수분을 섭취한다. 고분자 나노소재 연구자들은 나미브 딱정벌레의 생존을 위한 기능마저도 모사해 고분자 박막을 만들었다. 작은 물 분자를 흡수하는 이 박막은 추운 겨울 바깥에서 집으로 들어왔을 때 안경에 뿌옇게 김이 서리는 일을 방지하는 코팅제로 사용된다.
전복의 껍질이나 나비의 화려한 날개, 오팔 같은 보석은 인위적인 색채로 표현하기 힘든 영롱한 빛깔을 지니고 있다. 이런 빛깔은 물체에 포함된 색소 때문이 아니라 표면의 독특한 나노구조가 특정 파장을 갖는 빛만 반사시키기 때문이다. 전자현미경으로 전복이나 나비의 표면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일정한 모양이 규칙적으로 배열된 구조(광결정)를 발견할 수 있다. 고분자 나노소재를 사용해 광결정을 구현하면 표면의 색을 다양하게 조절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빛의 경로와 파장을 제어하는 광학소자를 만드는 데도 응용할 수 있다.
자연은 무궁무진한 아이디어 창고
전복껍질은 인간이 만든 세라믹에 비해 매우 우수한 강도를 갖고 있는데, 과학자는 수nm 두께의 유기물층과 무기물층이 주기적으로 바뀌며 쌓여 있는 구조에서 그 이유를 찾았다. 전복껍질에 충격이 가해지면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유기물층이 에너지를 흡수하고 무기질층은 구조를 유지하는 원리다. 인간은 결국 전복껍질을 모사해 무기물로 이뤄진 고분자층과 유기물로 이뤄진 고분자층을 반복적으로 배열해 전복껍질만큼 강도가 높은 ‘유·무기 하이브리드 박막’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1990년대 초 독일 과학자인 데커가 처음으로 제안한 ‘담지다층조립법’(Dip-Assisted Layer-by-Layer Assembly)은 고체 표면에 고분자를 흡착시켜 다층박막을 제조하는 방법으로 현재 가장 널리 사용되지만 문제점이 많다. 흡착시간이 길고, 표면이 고르지 않고, 흡착층과 흡착층 사이의 경계면도 불분명하다. 수nm 두께의 정렬된 구조를 만들기 어려운 셈이다. 높은 강도 외에 다양한 기능을 지닌 유·무기 하이브리드 박막을 제조하려면 박막의 내부구조나 표면의 거칠기를 nm수준으로 미세하게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서울대 기능성 고분자박막 연구센터는 이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2000년대 초에 담지다층조립법에 스핀코팅법을 결합한 ‘스핀조립법’(Spin-Assisted LbL Assembly)을 처음으로 제안했다. 스핀조립법은 박막 표면을 회전시켜 흡착되지 않은 고분자와 용매를 빠른 시간 내에 제거하는 방법이다. 이를 통해 다층박막을 제조하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하고 박막을 이루는 고분자(유기물)층과 무기물층의 경계도 뚜렷하게 만들 수 있었다. 두 층의 경계가 뚜렷하면 전자나 광자를 이용한 광전자 소자로도 활용할 수 있다.
자연모사기술이 유용하게 쓰이는 고분자 소재는 필름이나 접착제처럼 일상에서 사용하는 제품부터 초고밀도 반도체 같은 최첨단 전자제품까지 응용 분야가 다양하고 가능성이 많다. 이처럼 산업 전 분야에서 핵심적 역할을 맡고 있는 고분자 소재를 잘 활용하려면 소재, 물질 특성, 가공 기술 같은 학문적 지식과 기술도 바탕이 돼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이디어다. 자연이나 일상생활에서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뽑아내야 한다.
자연모사기술이나 고분자 소재를 연구하고 싶다면 어떤 전공을 선택해야 도움이 될까. 화학생물공학은 융합학문을 연구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소양을 함양하는 데 중요하다. 또 최첨단 분야에서 실제로 활용되는 연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 첨단 소재를 연구할 때도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다.
창의력과 호기심이 가득하다면, 실용적인 과학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고 싶다면, 원리를 이해하고 이를 응용해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고 싶다면 화학생물공학, 그 중에서도 고분자 나노소재공학에 도전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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