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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사 - 삶을 담는 그릇의 어제, 오늘, 내일
분야 산업기술/건축 날짜 2011-05-09
건축사 - 삶을 담는 그릇의 어제, 오늘, 내일

글 : 전봉희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 jeonpark@snu.ac.kr )


사례1.
서울의 곳곳에는 1920년대 이후 한옥이 대량으로 지어진 마을이 있다. 이곳의 주민들은 마당과 대청마루가 아늑하고, 마을의 경관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좁은 골목에 몰린 오래된 집은 철거하고 새로 짓자는 의견도 있다. 주민들의 불편함을 해결하면서 한옥 마을의 가치를 보존할 해결책은 무엇일까.

사례2.
한국사람 4명 중 1명이 본 영화 ‘왕의 남자’의 배경이 된 궁궐은 문화재 훼손의 위험 때문에 실제 궁궐에서 찍을 수 없었다. 제작진은 철저한 고증 작업을 해 궁궐을 재현한 세트를 짓고 3D 컴퓨터그래픽(CG)을 이용해 영화를 제작했다.

야구감독은 상대팀의 장단점을 파악하기 위해 그 팀이 했던 경기를 살펴보고 선수들의 전적을 되새긴다. 골프선수는 자신의 스윙 자세를 캠코더로 녹화해 몇 번이고 반복해 보면서 잘 쳤을 때와 못 쳤을 때의 자세를 비교한다. 이들은 모두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과거를 돌아보는 사례다. 이처럼 미래의 건축문화를 향상시키기 위해 건축의 과거를 연구하는 사람도 있다.

바로 건축의 역사인 건축사(建築史)를 연구하는 사람이다. 건축사학자로 불리는 이들은 과거의 건물을 연구한다. 그 건물이 지어진 연대, 형태와 배치에 나타나는 특징, 주변의 자연?인공 환경과의 관계, 그 건물에 반영된 사상적?경제적?기술적 배경을 밝힌다. 건축사에 대한 지식은 건축 전반에 걸쳐 폭넓은 시각을 갖게 한다. 예로부터 건축가는 좋은 건물을 설계하기 위해 주어진 과제의 조건에 맞게 기존 건물의 특징과 새로운 건축기술을 창의적으로 응용했다. 과거 건물은 각 시대마다 건축가, 장인, 건축주가 당시의 조건을 고심하며 만든 결과물이다.


사고 폭 넓혀야 창의적 설계 가능
건축사를 공부하는 일은 과거 수많은 건축가의 경험을 자신의 지식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이미 지어진 건물의 형태와 배치, 공간을 만드는 방식에 대해 분석하면 사고 폭이 넓어져 창의적인 설계를 할 수 있다.

건축가가 아니더라도 건축사를 알면 도움이 된다. 머리 깎을 때를 생각해보자. 멋진 머리모양을 갖기 위해서는 헤어 디자이너의 솜씨도 좋아야 하지만 자신에게 어떤 머리 모양이 어울리는지 잘 알고 이를 헤어 디자이너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건물을 지을 때도 마찬가지다. 건물의 설계를 의뢰하는 건축주가 건축가와 협의할 때 건축주가 내놓는 의견은 건축의 질에 영향을 미친다. 건물을 헐더라도 그 건물이 차지하던 대지의 모양과 그 건물의 영향을 받아서 결정된 주변 건물의 모양은 여전히 남아있기 마련이다. 사례 1의 경우 건축주가 역사적 사실과 함께 생활의 불편함을 건축가에게 설명할 수 있다면 건축가가 건축주의 취향에 맞는 좋은 건물을 짓는 데 유용한 참고사항이 된다.

건축사는 지역 규모의 건축을 할 때도 요긴하게 쓰인다. 지방자치제가 활성화되면서 각 지역마다 건축 문화유산을 관광자원으로 만드는 시도가 잇따르고 있다. 건축물의 고유한 역사적 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면서 관광객이 즐겁고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는 시설을 마련하려면 그 지역의 건축사에 대한 연구를 참고해야 한다. 사례 2처럼 사극이나 게임에 등장하는 집과 마을을 역사적 배경에 근거해 재현할 때도 건축사의 성과물이 활용된다.

건축사를 연구한다고 하면 자칫 고서 위주의 문헌만 본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건축사 연구는 현지조사가 매우 중요하다. 조사원은 프로젝트에 따라 국내는 물론 세계 각국을 찾아다닌다. 예를 들어 도시주택을 조사하기 위해 베트남 하노이를 방문하고, 중국 치엔먼(箭門) 앞 역사보호지구의 유적을 조사하기 위해 중국 베이징으로 떠난다. 방학기간에는 학부생으로 이뤄진 대규모 조사단을 구성하기도 한다. 현지조사를 떠날 때는 카메라와 노트북, 실측장비를 챙겨야 한다. 현지에서 측정한 자료를 정확한 도면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세계를 다니며 현지조사
건축사의 연구대상은 과거의 건축물이지만 연구에 쓰이는 방법은 첨단 기법까지 아우른다. 최근에는 다른 분야처럼 컴퓨터와 전자장비의 활용이 늘었다. 광파측정기를 이용해 건물과 부지의 용적과 면적을 측정하고, 오토캐드(AutoCAD) 같은 설계 프로그램으로 한옥이나 근대건축물의 도면을 3차원으로 작성한다. 또 도시주택을 조사할 때는 지리정보시스템(GIS)를 이용해 현재 주택분포를 조사하고 도시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설 미래를 예측하기도 한다.


현지조사의 자료를 기반으로 컴퓨터를 활용하면 옛날 건축물과 도시의 상세한 모습을 복원할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자료는 복원도, 연구논문, 조사보고서 같은 2차 자료로 가공돼 건축가에게 제공되거나 일반에 공개된다. 대학에는 건축계획과 설계를 가르치는 건축학 전공과 건축의 공학적 측면을 해결하는 전문가를 양성하는 건축공학 전공이 있다. 건축역사학은 두 분야에 필수과정으로 들어있지만, 건축의 문화적 측면을 강조하는 건축학 전공에서 더 깊이 배울 수 있다. 더 전문적인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대학원에 진학해야 한다.


지역과 시대에 대한 열린 생각
건축사학자에게 가장 중요한 소양은 열린 생각이다. 건축은 공학인 동시에 응용예술이다. 건물 하나를 짓기 위해서는 주변 환경을 고려해 건물의 모양을 디자인하고 그 모양을 이루는 데 적합한 구조를 결정해야 한다. 그래서 건물은 용도나 시대, 지역에 따라 천차만별로 다르다.

건축사는 지역별로는 한국,중국,일본,서양 건축으로, 시대별로는 고대,고려,조선,근대 건축으로 나눈다. 그러나 한국 건축이라고 해서 중국,일본,서양 건축과 단절돼 발전할 수는 없으며 조선 건축도 고려 시대까지 축적된 건축 유산을 이어받아 근대 건축에 영향을 끼친다. 따라서 특정 지역이나 시대를 연구할 때도 동시대에 교류했던 지역의 건축을 이해하고 앞선 시대와 다음 시대에 대해 고려하는 열린 생각이 필요하다.

건축사학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건축사학자가 되면 일반적인 건축가 외에 대학이나 정부기관, 연구소, 설계사무소에서 연구나 설계를 하는 전문직에 종사할 수 있다. 또 최근 부각되는 역사문화관광자원의 발굴과 보존, 재활용 방안을 마련하는 일도 건축사학자의 몫이다. 열린 생각을 가지고 남달리 지적 호기심이 강하며 주변의 물리적 환경과 사람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졌다면 건축사학자의 꿈을 키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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